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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Talk - 소소한 일상/겜.알.못. 이 게임회사에서 버티기

[직무/추억] 되는대로 사는 삶을 거부했다.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by 파랑곰토끼 2024. 12. 2.

주변의 모든 사람이 얼마 못 버티고 나갈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생각보다 나는 내 직업에 대해서는 예민한 사람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난 그냥 될 대로 되라지.. 이러면서 살았을 것이다. 

 

회사라는 조직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보자면..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스무 살에 들어간 학교의 전공은 "디자인계열 > 영상디자인학과"였다. 

디자인계열이라고 하면 미술을 했나 보다.. 했겠지만, 실기 없이 내신으로 학교를 입학했다. 

그곳에서 사진, 영상편집, 애니메이션, 등등을 배웠고, 지금 흔히 멀티미디어라고 불리는 도구들을 2년 동안 익혔다. 

뭐 썩 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취미로 하기에는 충분함이었으나, 내 직업으로 하기에는 .. 흠.. 그다지 뛰어난 실력은 아닌 거 같았다. 

 

첫 직장은,  그 지역에서는 큰 현상소였다.

 

 

갖은 수모를 겪으며 다닌 게 6개월인데,

그때 그만둔 이유는 직원보다는 돈이 더 중요하던 사장님의 태도였던 것 같다.

아파서 조퇴를 한다고 하니, 사장님이 한다는 말...

"바쁜데 아프면 어떻게 하냐, 너의 일은 네가 다녀와서 다 해라" 이말에 그만뒀다. 서러웠기도 했다. 

내가 아픈데, 야근비도 못 봤고, 4대 보험도  혜택도 못 받는 회사라는 곳에서 내가 뭘 위해 다니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만뒀다.

 

약 한 달 정도 놀다가 프리랜서의 명분으로 아기 전용 사진관을 들어갔다. 말이 좋아 공무원 시험이지..

그냥 일하기 싫었던 때였다. 현상소에서 배운 기술을 써먹을  곳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2003년 1월 정도부터  2005년 가을까지 다녔다. 사장님이 빠른 손을 인정해 주시며, 5시간 시간 알바에서 풀타임 알바로 근무를 바꿨다. 

 

당일 매출에 따라 월급여부가 결정 됐다.

 

사진관은 불안함이 많았다.

내 월급날에 당일의 매출에 따라 현금을 주는 경우가 많아서 매달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그날 매출이 없거나 사진관이 쉬는 날이면 월급이 조금 늦게 들어오는 일이 생기곤 했다. 물론 소득세도 떼지 않았다. 말이 프리랜서 지 알바나 다름없는 곳을 2년여 다녔다.

 

그러던 2005년 가을..

탈출을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작은 골방에 썩어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 엄마께 상의하고 학교 편입을 해야겠다고 했다. 이유는 그래도 번듯하다고 말하는 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취업사이트에 등록된 이름 있는 회사들은 주로 4년제 이상 졸업자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계속 꿈을 키워오던 방송일을 하고자 한다면 학사 이상의 자격이 필요함을 느꼈던 것 같다.

 

인생의 갈림길에 있던 가장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 후 학교를 또 편입해서 배운 걸 써먹을 수 있는 전공을 선택했다.

디자인은 애초에 그림에는 소질이 없기에 미대 편입은 꿈도 못 꿨고, 이전학교 성적만으로도 편입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았다.

그렇게 내 나이 26세, 학교를 선택해서 편입하고 2008년 졸업을 했다.  집이 지방이다 보니 서울로 가야 할 명분이 필요했고, 우연히도 아빠의 사촌 동생의 집에 머물게 되며 또 6개월의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또 사진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일단은 거취를 옮기는 목표에 성공은 한 거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