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임/끄적임의 정도

[웹소설/Since 1999 ... 2017] 1부 : 1st Login

천진한 낭만 토끼 2026. 8. 29. 01:55

1999년.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이었다.

 

야후나 라이코스 같은 검색 창에 접속하고, 한메일함에 새 편지가 왔는지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때.

정안 역시 그 유행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컴퓨터 전원 버튼부터 눌렀다.

본체가 위잉 소리를 내며 켜지고, 익숙한 웹 브라우저 창이 화면을 채웠다.

 

정안은 웹 포털의 채팅 서비스에 들어가 익숙하게 대화방 목록을 훑었다.

백그라운드에는 좋아하는 MP3 음악을 틀어놨었다.

 

누군가는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상을 늘어놓았고,

누군가는 새로 나온 가수의 앨범 이야기를 했으며,

또 누군가는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깊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정안은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현실의 공간에서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말들을, 이곳 인터넷 세상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쉽게 터놓을 수 있었으니까.

그날 밤도 평소와 다름없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대화창에 새로운 닉네임 하나가 등장했다.

 

[CK1015] : 안녕하세요.

 

정안은 그저 무심하게 올라가는 대화들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수십 개의 글자가 정신없이 위로 롤링되고 있는 와중에도, 유독 그 사람이 남긴 문장만 묵직하게 눈에 들어왔다.

진하게 칠해진 글자.

정안은 마우스를 잡고 화면을 몇 번이나 움직여 보았다.

혹시 내 컴퓨터 모니터나 프로그램이 고장이라도 난 걸까 싶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문장이 떠올랐다.

 

[CK1015] : 여기 음악 좋은 거 많네요.

 

정안은 자신도 모르게 그 짧은 문장을 몇 번이고 되새겨 읽었다.

그리고는 홀린 듯, 그 사람을 향해 첫 답장을 입력했다.

 

[J_0830_AN] : 그러게요. 뭐 듣고 계세요?

 

오래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CK1015] : 지금은 그냥 아무거나요.

[CK1015] : J_0830_AN님은요? 

 

정안은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화면 건너편의 누군가가 화면 속 제 이름을 가만히 불러주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러웠다.

 

그때의 정안은 알지 못했다.

상대의 화면 속에서도 자신의 닉네임이 다른 어떤 이들의 글자보다 진하고 선명하게 찍히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날 이후, 두 사람의 대화는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누군가 접속하지 않는 날이면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 화면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리게 되곤 했다.

접속 알림이 뜨면 마치 서로를 찾아 헤맸던 것처럼, 정안도 태율도 익숙하게 1:1 대화창을 열었다.

 

즐겨 듣는 음악, 매일 반복되는 학교 생활, 코앞으로 다가온 수능 이야기,

그리고 얼굴조차 모르는 상대에게 나누기엔 지나치게 사소하고 다정한 일상의 조각들.

그러던 어느 깊은 밤, 대화를 이어가던 태율이 먼저 용기를 냈다.

 

[CK1015] : J_0830_AN님, 우리 이제 말 놔도 되지 않을까? 동갑이잖아.

[J_0830_AN] : 그럴까...요?

 

어색한 공기가 대화창 너머로 맴돌았다.

말 한마디 건네는 데에도 머뭇거림이 묻어나는 어색한 존댓말과 반말의 경계.

그리고 그날 밤, 익명성이 당연하던 온라인 공간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 일어났다.

서로의 닉네임이 아닌 본명을 트는 통성명. 그 소중한 물꼬를 터트린 것 역시 태율이었다.

 

[CK1015] : 나는 강태율이고, K대부속고등학교 3학년이야.

[J_0830_AN] : 아.. 나는 유정안이고, 너네 학교 옆옆학교 다녀. 말했던 것처럼 나이는 너랑 동갑이야.

[CK1015] : 아 진짜? 그럼 우리 한번쯤 만날 법도 했겠다.

[J_0830_AN] : 그럴 수도... 근데 난 기숙사 살아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두 사람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서로의 이름과 다니는 학교 이야기까지 자연스레 털어놓게 되었다.

1:1 대화창 너머의 상대가 조금씩 더 또렷한 실체로 다가오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두 사람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서로의 이름과 다니는 학교 이야기까지 자연스레 털어놓게 되었다.

1:1 대화창 너머의 상대가 조금씩 더 또렷한 실체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 모의고사 난이도나 어려운 문제를 묻고 답하며 대화가 익어갈 무렵, 태율이 다시 한번 조심스레 용기를 냈다.

 

[CK1015] : 정안아, 우리 수능 끝나는 주말에 볼까?

 

갑작스러운 태율의 제안에 정안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10대의 마지막 길목에서 마음이 잘 통하는 진짜 친구를 얻게 될 것 같은,

가슴 한구석이 몽글거리는 기분이 밀려왔다. 정안은 미소를 지으며 자판을 두드렸다.

 

[J_0830_AN] : 그래! 그때 만나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렇게 두 사람은 약속을 잡았다.

 

수능이라는 커다란 시험이 끝나고 나면 마침내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그때만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1999년.

수능을 딱 일주일 앞둔 어느 깊은 밤의 일이었다.

 


 

 

 

수능이 끝났다.

그리고 대학 합격자 발표까지 모두 끝난 어느 날, 두 사람은 드디어 만나기로 했다.

1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사람들이 누구나 알 수 있는 장소였다.

시계탑 앞 분수광장.

약속을 정하기 전까지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매일 밤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다.
좋아하는 음악도 알고, 지원한 대학도 알고, 어떤 과를 가고 싶은지도 알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만 모를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날짜가 가까워지자 정안은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며칠 전 태율에게서 이메일이 한 통 왔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정안은 한참 동안 그 사진을 들여다봤다.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태율은 정안이 생각했던 것보다 아담했고, 진했다.
여리여리한 훈남보다는 단단한 인상이었다.

대화하면서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에 지원했는지 알고 있었으니, 애초에 아주 여린 이미지의 남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래도.

실망은 어쩔 수 없었다.

정안은 태율을 처음부터 아주 조금은 남자친구 후보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혹시 만나면 정말 잘 맞는 사람이 아닐까.

혹시 영화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정안도 사진을 보내달라는 태율의 말에 사진 한 장을 골랐다.

문제는 그 사진 속 여자가 정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친구의 사진이었다.

정안은 자신의 사진을 보내는 것이 왠지 부끄러웠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이미 모든 게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약속 당일.

정안은 시내 중심가 시계탑 앞 분수 광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3층 카페에 앉아 있었다.

일부러 일찍 나와 잡은 창가 쪽 자리였다.

탁자 위에는 다 식어가는 카페라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정안은 초조한 기색을 숨기며 유리창 너머로 광장을 맴도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수능이 끝난 직후의 주말은 어디나 사람들로 붐볐다. 들뜬 표정의 무리들이 하나둘 분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약속 시간인 오후 6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정안은 무리 속에서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태율이었다.

오늘 약속 장소에 나오기 다섯 시간 전,

새벽녘에 그가 '친구들이랑 찍은 거'라며 채팅 메시지로 쑥스럽게 전송해 준 스티커 사진 속 바로 그 얼굴.

 

단정한 네이비색 더플코트를 입고 있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실제 모습은 생각보다 아담하고 다부진 체형이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키가 훤칠하고 꽤 반반한 외모를 가진 남자애 한 명과 함께 광장 앞에 서 있었다.

정안은 분수대 앞 두 사람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채고 말았다.

 

태율의 옆에 서 있는 저 키 큰 친구가 바로 스티커 사진 속에서 정안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던, 바로 그 멋진 친구라는 것을.

 

정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가만히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사진을 확인했던 새벽부터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식어버린 상태였다.

화면 너머로 주고받던 다정한 말투에 환상을 품었지만,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외형적인 조건은 생각보다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정안이 혼자 상상하고 기대했던 미소년의 이미지와 실제 태율의 모습은 거리가 멀었다.

 

자연스럽게 태율보다는 그 옆에 서 있는 잘생긴 친구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굳이 내려가서 저 사람을 만나야 할까…?'

 

지나치게 솔직하고도 차가운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태율을 마주하기도 전에, 정안의 마음은 이미 3층 창가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 무렵, 태율 역시 다가오는 토요일을 앞두고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마침내 정안을 직접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화면 너머 대화창에서는 몇 시간이고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막상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할 만큼 마음이 두근거리고 불안했다.

 

한참을 혼자 방 안에서 끙끙대며 고민하던 태율은 결국 수화기를 들고 절친한 친구인 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김기현."

 

"왜."

 

"너 토요일에 약속 있냐?"

 

"없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태율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같이 좀 나갈래?"

 

"어딜?"

 

"나 정안이 만나기로 했거든."

 

"뭐?"

 

기현의 목소리가 단번에 한 톤 높아졌다.

 

"정안이를 만나? 너 그 인터넷 채팅방에서 매일 밤마다 얘기한다던 그 정안이?"

 

"어."

 

"와, 진짜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로 한 거야?"

 

"어… 그렇게 됐다."

 

수화기 너머로 기현이 잠시 말을 잃은 듯하더니, 이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근데 좋은 날에 왜 나를 부르냐? 눈치 없이 낀 것도 아니고."

 

태율은 괜히 아무도 없는 벽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혹시 내가 바람 맞을 수도 있잖아."

 

"뭐?"

 

"그러니까, 혹시 그 애가 약속 장소에 안 나오면…"

 

"야, 이 친구야."

 

기현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지금 정안이 만나기도 전부터 바람 맞을 걱정부터 하고 있냐?"

 

"아니, 그게 아니라…"

 

태율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 키 작잖아."

 

"그래서?"

 

"보통 여자들은 키 큰 남자 좋아하잖아. 스티커 사진을 스캔해서 보내주긴 했는데…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더 작다고 실망할 수도 있고."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화면 속에서는 당당했던 태율이었지만, 현실의 열아홉 소년은 자신의 외모에 그다지 자신감이 없었다.

기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

 

"왜."

 

"세상 모든 게 다 완벽할 수는 없어."

 

"알지…"

 

"그리고 네가 혼자 지레겁먹고 걱정하는 것보다, 정안이라는 애가 너라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니냐?"

 

기현의 진지한 말에 태율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더 무섭지."

 

태율의 진심 어린 마음에 기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빵 터지고 말았다.

 

"알았다, 알았어. 토요일에 같이 나가줄게."

 

"진짜지? 취소 없다?"

 

"대신 너 바람 안 맞고 정안이 만나면, 난 그 자리에서 바로 집에 간다."

 

"아니지, 가지말고 같이 놀아야지! 둘만 있으면 어색할 수도 있잖아."

 

"야, 네 데이트에 내가 왜 끼냐? 내가 무슨 보디가드냐?"

 

태율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다가온 토요일 오후.

기현은 약속대로 태율과 함께 약속 장소인 시계탑 앞 분수 광장으로 나왔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태율은 자신도 모르게 몇 분 간격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기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얘가 그 정안이라는 애를 진짜 많이 좋아하긴 하나 보네.'

 


태율과 만나기로 한 그날 아침.

정안은 컴퓨터 전원을 켜고 채팅 프로그램에 접속해 유정을 불렀다.

잠시 후, 익숙한 닉네임이 대화창에 띄워졌다.

 

[유정] : 왜 불렀어?

[J_0830_AN] : …얘 있잖아.

[유정] : 뭐가?

[J_0830_AN] : 채팅에서 알게 됐다던 애.

[유정] : 아.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유정의 질문이 이어졌다.

 

[유정] : 그 운동한다던 친구?

[J_0830_AN] : 어.

[유정] : 근데 걔가 왜?

 

정안은 한참 동안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 머뭇거렸다.

몇 번이나 글자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던 정안은, 결국 눈을 감고 엔터를 눌렀다.

 

[J_0830_AN] : 너 사진 보냈어.

 

한동안 대화창에 답장이 올라오지 않았다.

 

[유정] : 뭐?

[J_0830_AN] : 미안…

[유정]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J_0830_AN] : 네가 나 대신 나가볼래?

[유정] : 너인 척하고?

[J_0830_AN] : 어.

[유정] : 좀 그렇다?

[J_0830_AN] : 어… 좀 그렇지.

 

유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안은 초조함에 괜히 손톱 가시를 만지작거렸다.

 

[유정] : 어차피 통화 목소리도 모르잖아. 괜찮지 않을까?

 

정안은 유정의 말에 순간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이어 올라온 유정의 날카로운 질문에 가슴이 철렁했다.

 

[유정] : …근데 키 작다며?

[J_0830_AN] : 어.

[유정] : 키 작은 게 문젠 거야?

[유정] : 아니면 내 사진 보내서 미안한 게 문젠 거야?

 

정안은 바로 대답을 입력하지 못했다.

모니터의 커서만 빈 화면에서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한참 뒤에야 정안이 자판을 두드렸다.

 

[J_0830_AN] : 둘 다…?

 

유정의 답장이 곧바로 올라왔다.

 

[유정] : 하…

[유정] : 이 외모지상주의.

[J_0830_AN] : 아니, 그게 아니라…

[유정] : 그렇게 별로야?

 

정안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J_0830_AN] : …어.

[유정] : 얼마나?

[J_0830_AN] : 스티커 사진을 전송해 줬는데… 키도 작고 피부가 좀 트러블성이야.

[유정] : 그럼 그냥 연락 끊으면 되잖아.

[J_0830_AN] : 어… 근데 그게 또 맘대로 안 되네?

[유정] : 왜?

 

정안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적어 내렸다.

 

[J_0830_AN] : 정들었나 봐.

 

이번에는 유정도 바로 답을 적지 못했다.

깜빡이는 커서만을 바라보던 유정이 다시 문장을 보냈다.

 

[유정] : 얼마나 별론데 그래. 사진 보내봐.

 

정안은 새벽에 한메일로 전송받았던 태율의 스티커 사진 파일을 유정에게 메일로 첨부해 보냈다.

사진을 확인한 유정은 잠시 후 채팅 대신 정안의 방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유정의 목소리는 제법 진지했다.

 

"…고민될 만하네."

 

"그치?"

 

"어."

 

그리고 잠시 뒤, 유정이 덧붙였다.

 

"근데…"

 

"뭐?"

 

"그 옆에 있는 친구 잘생겼다야."

 

정안은 나지막이 피식 웃었다.

 

"나도 그 생각 했어."

 

"아니, 잠깐만."

 

유정이 첨부된 사진을 모니터 가까이 끌어당겨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잘 못 보낸 거 아니야?"

 

"뭐가?"

 

"알고 보니 그 옆에 있는 잘생긴 애가 네가 말한 그 운동한다는 태율이 아니야?"

 

정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가능성은 없어."

 

"왜?"

 

"태율이가 옆에 있는 사람은 자기 친구라고 분명히 말했거든."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아니야. 자기 절친인데 학교에서 인기 엄청 많다는 얘기도 미리 했었어."

 

정안은 확신에 차 대답했다. 그런데 말을 내뱉고 나니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왜 이렇게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단정 지은 걸까.

사진 속 주인공이 태율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은 오기였을까.

아니면… 차라리 저 잘생긴 친구가 태율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이었을까.

정안은 꼬리를 무는 생각을 털어내려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너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유정이 물었다. 정안은 수화기를 잡은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모르겠어."

 

정안 역시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갈팡질팡 고민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외모 때문에 싫어진 거라면 답은 간단했다.

그냥 이대로 접속을 끊고 연락을 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사진을 속여 보낸 게 미안하다면 사과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난 6개월 동안 태율과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들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밤늦게까지 서로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를 나누던 것,

수능이 끝나면 꼭 만나자고 새끼손가락 걸듯 약속했던 것,

자신이 지나가는 말로 좋아한다고 했던 노래를 기억해 주고 틀어주던 것…

정안은 텅 빈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하필이면 함박눈이 펄펄 내리던 토요일 오후 6시.

결국 약속 장소인 시계탑 분수대 앞에 정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6시 30분.

 

약속 시간에서 30분이 지나도록, 새벽에 이메일로 전송받았던 사진 속의 그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펄펄 날리는 눈발 속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던 태율은 마치 어느 정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곁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함께 서 있던 기현이 무심한 척 태율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강태율, 나 알바하는 PC방이나 가자. 너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잖아?"

 

그때, 누군가 태율의 등을 툭 치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강태율! 너 여기서 뭐 하냐?"

 

고개를 돌려보니 같은 반 친구인 정현이었다. 태율은 씁쓸한 마음을 숨기며 대충 둘러댔다.

 

"임정현? 너야말로 이 날씨에 여기서 뭐 하는데?"

 

"나?"

 

정현은 얼굴 가득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채팅하다가 여자애 한 명 알게 됐거든? 근데 알고 보니까 우리 학교 3반 홍민정이더라고."

 

"홍민정? 걔랑 여기서 만나기로 했냐?"

 

"어!"

 

"홍민정이 채팅을 다 하냐? 의외네."

 

그러자 정현이 기가 차다는 듯 씩 웃으며 태율의 어깨를 툭 쳤다.

 

"야, 강태율. 너도 채팅하는데 홍민정이라고 못 하겠냐?"

 

기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호호 불며 태율과 정현의 대화를 듣다가,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를 던졌다.

 

"야! 너나 쟤나 똑같아, 진짜. 수능 끝나자마자 채팅으로 대학 가기 전에 어떻게든 여친 만들어보겠다는 그 심보, 모를 줄 아냐?"

 

그러자 정현이 기현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며 기분 좋게 껄껄 웃었다.

 

"티 났냐? 그래도 상대가 홍민정이면 한번 만나볼 만하지 않냐. 우리가 살면서 어디 가서 배우 연습생을 개인적으로 만나보겠냐고."

 

턱을 슬쩍 들며 꺼드럭대는 정현을 보며, 기현도 반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근데 홍민정도 진짜 한가한가 보다. 너 같은 놈 만나려고 이 추운 날 여기까지 나오는 거 보면."

 

"내가 또 한 인물 하잖냐?"

 

너스레를 떠는 정현의 모습에 태율도 나지막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자식, 거들먹거리기는. 혹시라도 홍민정 안 나타나면 딴 데 가지 말고 김기현 알바하는 PC방으로 와. 스타나 한 판 때리게."

 

태율의 말에 정현은 절대 그럴 일 없다는 듯 입모양으로 "에이~" 하고 고개를 설설 저으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OK 표시를 그려 보였다.

 

세 사람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갈라섰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는 거리 위에서 정현과 헤어진 태율과 기현은, 차가워진 발걸음을 옮겨 기현이 알바하는 PC방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정안은 마음이 무겁게 짓눌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함박눈이 쏟아진 덕분에 그럴듯한 핑곗거리가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지하철이 계속 연착되는 바람에 제시간에 나갈 수 없었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명분은 충분했지만, 가슴 한구석을 찔러오는 찝찝함과 미안함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결국 정안은 마음을 다잡았다.

태율에게 사실대로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밤 10시 무렵, 컴퓨터 전원을 켜고 늘 들어가던 포털 사이트 채팅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였지만, 오늘 밤 태율이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안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자판을 눌러 태율에게 쪽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음.. 먼저 미안해. 저녁에 눈이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지하철 연착도 있었고, 몰래 나가려다가 엄마한테 걸려서 혼나는 바람에 못 나갔어. 아직 핸드폰 개통을 못 해서 미리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아… 다 변명이야. 실은 내가 보냈던 그 스티커 사진, 내 제일 친한 친구 사진이야. 일이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철없이 보냈는데… 아무리 스티커 사진이어도 막상 실물이 사진이랑 다르면 네가 실망할까 봐 무서워서 못 나갔어. 진짜 미안해.]

 

긴 고백이 담긴 쪽지를 전송한 정안은 조용히 접속을 종료했다.

 

그리고 며칠 후, 평소라면 태율이 전혀 접속하지 않을 어정쩡한 시간에 정안은 무심코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런데 수신함에 반가운 알림이 떠 있었다. 태율에게서 온 답장 쪽지였다.

 

[수요일 학교 끝나고, 늘 만나던 그 시간에 접속할게. 얘기 좀 하자.]

 

일방적으로 거짓말을 털어놓고 도망쳤던 터라 답장은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화면에 찍힌 태율의 짧고 담담한 문장을 본 정안은 그제야 멎었던 숨을 내쉬듯 마음이 한결 놓였다.

 


수요일 밤 10시.

 

띠링!

 

‘CK1015’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화면 오른쪽 아래로 반가우면서도 두려운 팝업창이 떠올랐다.

이내 마우스 커서가 멈칫하는 사이, 또 하나의 알림 창이 연속해서 올라왔다.

 

‘CK1015’ 님이 1:1 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순간 정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정안은 침을 꼴깍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대화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태율이 먼저 입을 떼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CK1015] : 안녕.

[wjddks0830] : 어. 안녕.

[CK1015] : 닉네임 바꿨네?

[wjddks0830] : 어. 기존 거는 좀 길고 어려워서, 그냥 간단하게 바꿨어.

[CK1015] : 음… 나 실은 그날 너 안 나올 줄 알았어.

[wjddks0830] : 어?…

 

잠시 커서가 깜빡이더니, 태율의 기다란 문장이 천천히 올려졌다.

 

[CK1015] : 생각해 보니 아무리 인터넷으로 친구 만드는 게 흔하다지만, 어쨌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잖아.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내 생각이 좀 짧았던 것 같아. 난 우리가 꽤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편하게 제안했던 건데, 나중에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다들 무서워서 오프라인에서는 잘 못 만난다고 하더라고.

 

[wjddks0830] : 아… 아니야. 진짜 나가려고 했어. 근데… 장난으로 보냈던 그 사진 때문에 차마 못 나간 거야. 진짜 미안해.

[CK1015] : 아, 진짜? …그럼 나중에 네 마음 편해지면, 그때 진짜 네 사진 전송해 줘.

 

태율의 담담하고 다정한 배려에 정안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졌다.

정안은 더 망설이지 않고 스캐너로 받아두었던 진짜 제 스티커 사진 파일을 대화창으로 전송했다.

 

[wjddks0830] : (사진을 전송했습니다.)

 

잠시 후, 사진을 확인한 태율의 답장이 올라왔다.

 

[CK1015] : 귀엽네. 예쁘다.

[CK1015] : 참, 그리고 저번에 보내준 그 스티커 사진 속 친구 말이야. 내 친구가 보더니 진짜 예쁘다고 하더라.

[wjddks0830] : 하긴, 내가 봐도 유정이는 예뻐.

 

서로의 오해를 풀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마음의 앙금을 털어낸 화해의 밤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채팅창에서 몇 번 더 마주치기는 했지만, 진짜 사진을 주고받기 전과 후, 아니, 약속을 어겼던 그날 이후로 둘 사이에는 미세한 어색함의 벽이 생겨버렸다.

결국 매일 밤 약속이라도 한 듯 접속하던 그 시간이 되어도, 정안도 태율도 선뜻 컴퓨터 전원을 켜지 않게 되었다.

 

10대의 마지막 겨울,

두 사람은 각자의 수능 성적표를 품에 안은 채 다가올 실기와 면접, 그리고 논술 준비에 온 신경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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