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띡, 띠띠딕— 띠리릭. 정적을 깨는 도어록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희수 씨, 나 왔어.”
서현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습관처럼 희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 없이 고요한 공기에 그녀는 신발을 벗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안 들어왔나….”
길고 긴 브랜드전략실 기획 회의에 갈증이 났다.
곧장 냉장고로 향해 시원한 물 한 잔을 들이킨 서현이 외투를 벗으려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문을 연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워!”
“아, 깜짝이야!”
놀란 서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흘겼다. 범인은 문 뒤쪽에숨어있던 희수였다.
“진짜,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장난을 쳐?”
“가끔 이래야 재밌지. 누나 반응이 제일 귀엽거든.”
희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서현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허리에 감겨오자 서현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오늘도 수고했어. 회사에서 하루 종일 모른 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오늘은 내 여자 절대 안 놔줄 거야.”
“으이그, 말이나 못 하면….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놓고. 언제 들어왔어?”
서현이 살짝 몸을 떼어내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후에 라디오 스케줄 끝내고, 카페 들러서 팬들이 써준 메시지에 답장 좀 달아주고 왔지. 집에 오니까 한 다섯 시쯤 됐나?”
“저녁은?”
“당연히 안 먹었지. 누나 오면 같이 먹으려고 샤브샤브 재료 포장해 왔어. 먹을래?”
“완전 좋지. 나 얼른 씻고 나올게.”
“응. 마음 같아서는 욕실까지 따라 들어가고 싶지만, 꾹 참고 준비해 둘게. 얼른 씻고 와요.”
희수는 욕실로 향하려는 서현을 다시 한번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는 소중한 것을 다루듯 그녀를 끌어안고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
“나도.”
서현은 다정한 목소리에 화답하며 그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곧 25년 차 장수 아이돌 그룹 ‘루미에라’의 메인보컬 희수.
그리고 루미에라 컴퍼니의 PR 및 프로젝트 매니저 서현.
세상 사람들은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사실도, 이미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부부라는 사실도.
[과거 회상: 그해 봄, 마케팅 원론 강의실]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캠퍼스는 서현에게 낯설기만 했다.
스물일곱. 대학교 3학년. 동기들은 이미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거나 졸업장을 품에 넣고 떠난 뒤였다.
서현은 아는 얼굴 하나 없는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전공 서적을 펼쳤다.
그때, 강의실 앞쪽이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야, 쟤 봐. 진짜 연예인 같다.”
“기획사 연습생이라던데?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이래.”
“아, 그래? 어쩐지 얼굴이 장난 아니더라. 근데 왠지 좀 까칠해 보여.”
아이돌 그룹 '루미에라'의 메인보컬로 이미 데뷔한 희수였지만, 대중의 반응이 미미했던 탓에 동기들 사이에서는 그저 '잘생긴 연습생'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수군거리는 시선들 사이로 한 남학생이 걸어 들어왔다.
갓 입학한 스무 살 특유의 풋풋함과 외모에서 풍기는 화려함이 섞인 묘한 분위기. 하지만 그를 둘러싼 공기는 차가웠다.
동기들은 그의 외모에 감탄하면서도, 왠지 모를 거리감에 누구 하나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희수는 무심한 표정으로 빈자리를 찾다 서현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서현은 힐끗 옆을 보았다.
오뚝한 콧날과 날렵한 턱선이 조각 같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잔뜩 날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서현은 먼저 입을 열었다.
“1학년?”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는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희수의 시선이 서현에게 향했다.
무심한 듯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네. 그쪽은요?”
“난 3학년. 1학년 때 성적이 안 좋아서 재수강하러 왔어.”
희수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3학년 선배가 왜 굳이 1학년 전공 필수 수업을, 그것도 혼자 듣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서현은 생긋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혼자 듣나봐?"
"......."
“보니까 혼자 듣는 것 같은데. 이 수업 나중에 그룹 과제 있는 거 알아? 꽤 까다롭거든.”
“…….”
“나랑 같이 할래? 팀원 찾는 것도 일인데.”
그게 두 사람의 시작이었다.
먼저 다가와준 서현의 제안에 희수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이목구비 또렷한 수려한 외모 때문에 다들 멀리서 구경만 할 뿐, 누구 하나 편하게 말을 걸어주지 않던 그에게 건네진 첫 번째 손길이었다.
그날, 마케팅 원론 수업의 칠판보다 더 선명하게 각인된 건 옆자리 선배의 다정한 미소였다.
[과거 회상: 캠퍼스 벤치, 중간 과제 회의 중]
서현은 당시 루미에라의 이름조차 없는 팬덤. 50여 명 중 한 명이었다.
정확히는 막내 석현의 팬이었다.
매일 MP3 플레이어에는 루미에라의 전곡이 담겨 있었지만, 서현은 희수의 옆자리에서 철저히 정체를 숨겼다.
혹여나 자신을 선을 넘는 팬으로 오해할까 봐, 그저 공부 잘하고 털털한 선배처럼 굴었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중단발, 그리고 콧등에 걸친 동그란 안경.
희수에게 서현은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어준 사람일 뿐 아니라, 학교생활 내내 유일하게 곁을 내어준 따뜻한 안식처였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함께 학식을 먹고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는 동안 캠퍼스에는 CC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PR 전략 수립>이라는 중간 과제 주제를 정하던 중이었다.
“나 하고 싶은 주제 있는데.”
서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뭔데요? 누나가 하고 싶은 걸로 해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거든. 실력도 좋고 노래도 진짜 기가 막히는데, 인지도가 너무 부족해.
지금 기획사 방식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전략을 짜보려고.”
희수는 펜을 돌리며 무심하게 물었다.
“아이돌? 누군데요?”
“루미에라.”
희수의 손에서 펜이 툭, 떨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희수가 눈을 크게 뜨고 서현을 바라봤다.
“루미에라요?”
“응. 루미에라.”
“누나, 잠깐만…. 누나 설마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요?”
“응, 알지.(미소).”
희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근데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요? 나 옆에 두고 모르는 척 연기한 거야?”
“연기한건 아니지만, 팬이라도 굳이 너한테 아는 척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긴하지.. 그럼 누나 최애는 누구에요? 설마 나?”
”아니“
”나 아니라구?“
”응. 꼭 알아야겠다면… 우리 황금막내 석현이.. “
서현의 덤덤한 대답에 희수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감동과 당혹감, 그리고 묘한 질투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아니, 나를 눈앞에 두고 우리 막내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또 뭐야…. 나 지금 진짜 자존심 상하려고 하네.”
“그럴 필요 없어. 우린 그냥 같은 수업 듣는 선후배 사이잖아. 안 그래?”
서현은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수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제 팀을 위해 전략을 짜겠다는 서현의 옆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을 가수가 아닌 '후배 희수'로 봐준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막내 석현을 좋아한다는 말에는 못내 심술이 났다.
[현재: 저녁 식사 준비 중]
식탁 위에서 샤브샤브 육수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재료를 손질하던 희수가 식탁에 앉은 서현을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오는 길에 석현이 만났어. 이번 화보 대박 났다고 입이 귀에 걸렸더라.”
서현이 채소를 다듬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 석현이 미모가 물올랐잖아. 선이 고와서 화면도 잘 받고.”
그놈의 선. 희수는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서현의 취향에 헛웃음을 삼켰다.
과거, 경영관 앞 벤치에서 과제를 하던 날에도 희수는 똑같은 말을 들었었다.
“누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우리 석현이가 왜 그렇게 좋은 거예요?”
당시 희수는 서현의 노트북 화면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막내 석현의 직캠을 보며 심술궂게 물었다.
“음, 우리 석현이는 선이 곱잖아. 예쁘기도 하고. 무엇보다 춤을 정말 잘 춰. 아이돌이라면 역시 춤이지!”
서현의 확신에 찬 대답에 희수는 애꿎은 샤프만 만지작거렸다.
“춤이야 뭐… 연습하면 다 추는 거고. 누나, 나는 노래 진짜 잘하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피지컬은 내가 훨씬 좋지 않아요? 석현이는 나보다 키도 작고 왜소한데.”
질투가 뚝뚝 묻어나는 질문에 서현은 동그란 안경 너머로 희수를 빤히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피지컬이 무슨 상관이야. 무대에서 빛이 나면 됐지. 자, 이제 질투 그만하고 여기 이 기획 좀 봐봐. 네가 보기에 이 표현 어때?”
공적인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돌리는 서현의 스킬에 희수는 분한 듯 입술을 내밀면서도,
결국 그녀가 내민 원고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희수는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서현의 앞접시에 놓아주며 중얼거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누나는 석현이 칭찬할 때만 눈이 반짝거려. 나랑 결혼해서 살고 있는 건 나인데 말이야.”
“무슨 소리야. 나 석현이 화보 홍보기사 내느라 분석한 거지.”
“거봐. 일이라고 하면서 사심 채우는 거 다 알아.”
잘 익은 청경채와 고기를 서현의 앞접시에 덜어주던 희수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근데 누나, 그거 알아?”
“뭐를?”
“나 지금 되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서현이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희수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15년이나 걸리긴 했지만, 결국 지금 누나의 최애는 나잖아. 그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새삼스러운 게 아냐. 나 진짜 그때, 대학생 때 말이야. 우리 석현이 질투 엄청나게 했었어. 기억 안 나? 누나가 맨날 걔 선이 곱네, 춤이 예술이네 하면서 칭찬할 때마다 나 속으로 피눈물 흘렸다니까.”
희수는 그때의 억울함이 다시 생각난 듯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 앞에서 대놓고 ‘내 최애 너 아니야’라고 말했을 땐 진짜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이만하면 나도 잘생기고, 피지컬도 좋고, 석현이보다 노래도 잘하고, 고음은 내가 다 하는데! 누나 시선은 맨날 춤추는 석현이한테 가 있으니까…. 내가 석현이보다 못한 게 뭐가 있나 매일 밤 거울 보면서 고민했다니까?”
서현은 희수의 유치하고도 진심 어린 고백에 웃음이 터졌다.
15년 전, 동그란 안경을 쓰고 무심하게 과제를 하던 선배 서현의 눈에도 사실 희수의 그 안달 난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는 걸, 그는 알까.
“그래서, 지금은 행복해?.”
“응. 행복해 죽겠어. 석현이가 아무리 예쁘게 춤을 춰도, 결국 누나 옆에서 같이 샤브샤브 먹고 침대에서 같이 잠드는 건 나니까.”
희수는 서현의 손을 살짝 맞잡으며 덧붙였다.
“진짜 다행이야. 누나 마음속 최애가 나라서.”
[과거 회상: 희수의 입대 영장 나오던 날]
마케팅 원론 과제는 아이돌을 주제로 한 신선한 전략 덕분에 최고점을 받았다.
그 성과를 발판 삼아 두 사람은 캠퍼스의 유명한 단짝으로 남는 듯했다.
하지만 희수가 2학년 2학기가 될 무렵, 소속사는 잔인하지만 현실적인 결정을 내렸다.
“누나… 나 군대 가요. 소속사에서 인지도 없을 때 빨리 다녀오래. 전략적으로 봐도 그게 맞는 거 같아서 그러기로 했어. 10월 입대야.”
희수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이별보다 더 서글픈 건 따로 있었다.
“누나 졸업식도 못 보고 가네….”
희수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그렁거릴 듯 아쉬워했지만, 서현은 의외로 담담했다.
오히려 소속사의 판단이 합리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 잘 다녀와. 네가 제대할 때쯤에는 루미에라 역주행시켜 놓을게.”
“누나 나 군대 간다는데 하나도 안 아쉬워? 그리고 역주행이라니, 3년 동안 반응 없던 팀이 그게 되겠어?”
희수가 기가 찬 듯 되묻자, 서현은 안경테를 살짝 밀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될지도 모르지. 내가 지금 짜고 있는 플랜이 있거든.”
희수는 서현의 비즈니스적인 태도에 속이 타들어 갔다.
입대를 앞둔 서러운 동생보다는 무능한 소속사를 대신할 전략가처럼 구는 그녀가 야속했다.
“누나… 나 군대 가면 편지는 써 줄 거예요?”
“내가 왜?”
“아니, 그래도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이 있는데!”
“글쎄. 석현이한테는 쓰겠지. 우리 석현이 군대 가면 누나가 매일 보낼 거야.”
“아, 진짜! 석현이는 나 제대하고 나서야 갈 텐데… 누나, 나한테도 좀 써주면 안 돼요? 우리 마케팅 원론 수업 같이 들은 동지잖아. 전우애 몰라요?”
희수의 절박한 외침에도 서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방을 챙겼다.
“그건 생각 좀 해보고. 일단 가서 건강하게나 다녀와.”
희수는 그날 밤, 군대에서 서현의 편지를 한 통이라도 받아내기 위해 어떤 작전을 써야 할지 고민하며 잠을 설치기까지했다.
희수가 군대에 있는 동안, 서현은 정말로 단 한 통의 편지도 쓰지 않았다.
야속할 만큼 철저한 침묵이었다.
훈련소에서, 그리고 자대 배치를 받은 뒤에도 희수는 매일같이 연신함을 확인했지만 서현의 이름이 적힌 봉투는 끝내 받아보지 못했다.
1년 반 넘게 캠퍼스를 함께 누비며 쌓았던 추억들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음.. 이서현.. 너무 해.. 진짜 안 써줄 지는 몰랐네..'
희수는 입대 전, 끝내 '좋아한다'는 고백 한마디 건네지 못한 자신을 매일같이 자책하며 군 생활을 견뎌냈다
그런데 희수의 전역을 불과 몇 달 앞둔 시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루미에라가 데뷔 5년 차를 맞이하던 해, 과거 그들이 불렀던 드라마 OST 한 곡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터졌다.
드라마의 흥행과 맞물려 곡의 애절한 멜로디가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고,
결정적으로 서현의 아카이브 속에 잠자고 있던 영상 하나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무명 시절, 비오는 날 비에 젖은 생쥐 같은 꼴로 공연한 무대에서,
비를 맞으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노래하던 멤버들의 모습이 담긴 직캠이었다.
발매된 지 4년이나 지난 곡, 빛의 기억은 차트 끝자락에서부터 무서운 기세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역주행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TV 화면 속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역주행의 아이콘'이라며 루미에라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생활관 안은 발칵 뒤집혔다.
동기들이 소리를 지르며 희수를 봐라봤다. 정작 희수는 멍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입대 전, 역주행시켜 놓겠다며 무심하게 툭 던졌던 서현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편지 한 통 없던 500일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잊은 게 아니라 뒤에서 그를 위해 가장 치밀한 전략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현이에게 편지를 쓰겠다며 질투를 유발하던 모습도, 마케팅 원론 수업의 동지일 뿐이라며 선을 긋던 차가움도,
어쩌면 희수가 군 생활에 전념할 수 있게 하려는 그녀만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희수는 전역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제는 더 이상 '마케팅 원론 수업 동기'라는 핑계 뒤에 숨고 싶지 않았다.
전역모를 쓰는 순간, 가장 먼저 달려가 전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제대 후 희수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캠퍼스에는 그를 구경하려는 몇몇의 팬들이 몰렸고, 강의실 책상에는 수줍은 요청이 잦았다.
하지만 그 화려한 풍경 속에서 희수는 지독하게 혼자였다.
서현은 번호까지 바꾸고 연기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루미에라가 정상을 향해 질주하는 동안, 서현은 팬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석현의 완벽한 찰나를 잡아내는 거물급 홈마.
희수는 스케줄을 다닐 때마다 혹시 카메라 부대 사이에 그녀가 있지는 않을까 눈을 굴렸지만,
서현은 단 한 번도 희수의 렌즈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렇게 엇갈린 시간이 쌓여 15년이 흘렀다.
루미에라의 20주년 월드 프로모션을 결정짓는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 자리.
“이번 프로모션을 함께 하게 된 홍보디렉터, 이서현입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여성을 본 순간, 희수는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20년 전, 동그란 안경을 쓰고 마케팅 전략을 짜던 선배는 없었다.
서현은 수안과 함께 '루미에라 20주년 월드 프로모션'의 경쟁PT에서 당당히 선정되어, 멤버들과 상견례 자리에서 세련된 수트 차림에 당당한 눈빛을 한, 업계 최고의 전략가 이서현이 서 있었다.
루미에라의 탄생부터 역주행의 순간, 그리고 미래의 비전까지. 누구보다 루미에라를 잘 아는 그녀의 전략은 완벽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두 명의 성덕 루미엘이 20주년 프로젝트를 이끈다'며 축제 분위기였다.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 희수는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서현의 시선이 아주 짧게 희수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사적인 감정은커녕,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서늘한 예의만이 감돌았다.
수많은 관계자 앞이라 아는 척조차 할 수 없는 상황.
희수는 자신을 철저히 타인으로 대하는 서현의 태도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동시에 깨달았다. 20년 전 그녀가 예고했던 '역주행'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그녀는 단 한 순간도 루미에라를, 그리고 자신을 놓은 적이 없었음을 말이다.
상견례 인사가 끝난 후, 서현은 희수를 지나쳐 회의실을 나갔다.
옅게 풍기는 그녀의 향수 냄새가 예전 캠퍼스 벤치에서 맡았던 비누 향과 섞여 희수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과거: 20주년 프로모션 당시. 루미에라 컴퍼니 옥상, 하늘정원]
월드 프로모션 준비로 서현이 루미에라 컴퍼니에 상주하게 된 지 벌써 몇 주째였다.
사무실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정막이 내려앉은 밤.
추가 근무를 마친 서현이 가방을 챙겨 일어서려던 찰나, 어둠 속에 서 있던 희수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망설임이 가득하면서도 무언가 비장함이 서린 눈빛이었다.
“서현 선배, 잠깐 나 좀 봐요.”
희수를 따라 올라간 옥상 하늘정원에는 차가운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희수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더니, 17년 전 차마 뱉지 못하고 삼켰던 말을 던졌다.
“저… 서현 선배.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
공기가 멈춘 듯했다.
서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동안 쌓아 올린 이성적인 장벽들이 흔들렸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희수야. 고마워. 근데 나는….”
거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희수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무너지는 것도 잠시, 그의 눈빛은 이내 서늘할 정도로 단단해졌다.
“그럼 우리,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거예요? 그 일 년 넘는 시간 동안 내 옆에서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면서.”
희수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서현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럼 우리, 외국인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하는 것처럼 해요."
"그래.인사.”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수의 입술이 서현의 입술 위로 겹쳐졌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은 서현에게 허락이자 부정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을 속여온 긴 세월에 대한 항복이었다.
서현이 미처 밀어낼 틈도 없이 희수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선배가 외계인이든, 아직도 석현이만 좋아하든 상관없어. 선배만 있으면 난 다 돼요.”
그 확신에 찬 목소리에 서현의 머릿속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들이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일곱 살의 나이 차이, 아티스트와 스태프라는 위태로운 관계, 그리고 스스로를 옭아매던 수많은 규칙과 거리감.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모든 현실적인 계산이 지워졌다.
서현은 스스로 놀랄 만큼 아무것도 따지지 않은 채, 그저 눈앞에 있는 희수의 젖은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17년 전, 마케팅 원론 수업 시간에 옆자리에 앉았던 그 스무 살의 소년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남자가 되어 서 있었다.
옥상에서의 그 사건 이후, 희수의 세계는 뒤집혔지만 회사의 시계는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아니, 오히려 서현은 전보다 더 철저하게 벽을 치는 듯했다.
복도 저편에서 서류 뭉치를 들고 걸어오는 서현을 발견한 희수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서현 팀장님, 잠깐 볼까요?”
주변 스태프들의 눈을 의식한 딱딱한 말투였지만, 눈빛만큼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서현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희수를 따라 비상구 근처 외진 복도로 향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희수가 억울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누나, 내 고백이 안 먹혔어요? 왜 난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지?”
“…….”
“우리 그날 옥상에서 분명히….”
희수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자, 서현이 안경테를 고쳐 쓰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인사라면서. 인사 진하게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
오는 사람마다 그렇게 다 반갑게 맞아줄 순 없잖아.”
희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던진 ‘인사’라는 말을 그대로 돌려받을 줄은 몰랐다.
“인사? 아니, 내 진심 꾹꾹 눌러 담은 그 고백은요? 그냥 인삿말이었냐고요!”
서현은 희수의 절박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는 희수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서늘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희수야. 미안한데, 나는 너를 남자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네??”
희수의 사고 회로가 일시 정지됐다.
분명 그날 옥상에서 서현의 호흡도, 떨림도 거짓이 아니었다고 확신했는데.
“그날은 분위기에 취해서, 혹은 네가 너무 비장하니까 나도 모르게 받아준 것뿐이야.
우린 20년 차 아티스트와 스태프고, 난 여전히 네 전략가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서현은 말을 마치고 미련 없이 뒤돌아 복도를 걸어 나갔다.
홀로 남겨진 정희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희수는 몰랐다.
멀어지는 서현의 구두 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간 서현이 세면대 거울 속 벌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28살의 서현이 21살 희수에게 선을 그었듯, 지금의 서현도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위해 다시 한번 필사적인 전략을 짜고 있었다.
떠들썩한 회식 자리, 서현은 머리를 식히려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를 쐬며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어느새 희수가 다가와 곁에 자리를 잡았다.
취기가 오른 서현이 몸을 휘청이자 희수가 단단한 팔로 그녀를 붙들었다.
“이거 봐. 옆에 내가 오니까 일부러 흔들리는 거 같네. 맞죠?”
희수의 장난 섞인 말에 서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 “
그래도 희수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서현의 단호한 말에 희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왜요? 내가 아직 누나 눈엔 어려서? 아니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바람 같은 연예인이라서?”
“지금의 나는 연애도 사치야. 내 꿈 쫓아서 선택한 길이지만, 누가 날 좋아한다고 해도 그 감정이 뭔지 이제 모르겠어.”
서현의 고백은 무거웠다.
20년 넘게 일에만 매달려 감정이 메말라버린 그녀에게 사랑은 낯선 숙제였다.
그때 희수가 서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파격적인 제안을 던졌다.
“누나, 그러면 연애 말고 결혼할래요? 나는 누나랑 결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싶은데, 연애는 결혼 후에 하면 되잖아.”
술기운이었을까, 아니면 20년을 지켜봐 온 희수의 진심에 항복한 것일까.
서현은 홀린 듯 대답했다.
“그래, 하자. 결혼.”
“이번엔 진짜예요! 무르기 없기.”
희수는 확답을 받아내듯 서현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럼, 20주년 콘서트 끝나면 그때 식 어때요?”
“식은 필요 없어. 거추장스러워.”
“그래도 누나 웨딩드레스 입으면 진짜 예쁠 텐데…. 진짜 나랑 부부 하는 거 맞죠? 진짜죠?”
“응, 알았으니까 그만해.”
확인을 거듭하던 희수가 환하게 웃으며 서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럼 나 키스해도 돼요? 내 아내에게 키스하는 건 괜찮잖아.”
서현의 입술이 희수의 입술에 닿았다. 그날의 약속은 빈말이 아니었다.
희수는 20주년 콘서트 후 희수와 서현은 말과 다르게, 4년간 연애를 하며 한동안 숙소에서 지내며 서현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다 숙소 계약이 만료될 즈음, 거추장 스러운 과정을 생략하고 혼인신고 후 서현이 살던 아파트에 그곳으로 들어왔다.
루미에라 24년 차가 되던 여름의 일이었다.
팬들은 그저 두 사람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줄로만 알았다.
같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숨소리를 나누는 부부라는 사실은,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가장 은밀하고 달콤한 전략이었다.
[현재: 샤브샤브 식탁 위]
보글보글 끓는 육수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희수는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서현의 앞접시에 놓아주며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그 다큐 인터뷰 내용을 수정 없이 그대로 내보내겠다는 거야?”
서현이 젓가락을 멈추고 묻자, 희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큐는 어차피 공연 끝난 뒤에 공개될 거니까. 25주년 공연 때 내가 직접 말하려고 하거든.
사실은 연애 중이라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큐 속 인터뷰도 팬들에게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을까?”
서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25년 차 베테랑 아이돌의 공개 연애 선언.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해도 팬들에게는 거대한 파장이 일 것이다.
“어떻게 이야기하려고? 멘트는 생각해 뒀어?”
“그건 아직 고민 중. 사실 누나가 짜주는 전략이 제일 완벽하긴 한데…. 이번만큼은 내 마음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누나가 같이 고민해 주면 더 좋고. 히히.”
희수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애교 섞인 반응을 보이자, 서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PR 담당자 입장에서 이건 거의 국가 비상사태급이라고.”
“팀장님으로서는 비상이겠지만, 내 아내로서는 좀 도와줄 수 있잖아.
21년 전 마케팅 수업 때처럼 말이야. 나를 가장 빛나게 해줄 사람, 누나밖에 없다는 거 알잖아.”
희수는 식탁 너머로 서현의 손을 살살 맞잡았다.
“팬들도 이해해 줄 거야. 루미에라 메인보컬 정희수가 25년 동안 한 여자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면, 오히려 박수 쳐주지 않을까? 그리고 그 상대가 우리 팀을 살려낸 일등 공신인 누나라면 더더욱.”
서현은 희수의 단단한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20년 차 여름에 술김에 승낙했던 결혼이었지만, 지난 4년의 시간은 그 어떤 전략서보다 견고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알았어. 공연 전까지 가장 정희수답고, 우리 팬들이 상처받지 않을 최선의 고백문을 같이 만들어보자.”
“와! 역시 우리 부인밖에 없네. 자, 이제 이 고기도 먹어봐요. 누나 주려고 제일 좋은 부위로 골라왔어.”
희수는 신이 난 듯 서현의 접시를 가득 채웠다.
25주년 공연이라는 커다란 산을 앞두고 있었지만, 따뜻한 샤브샤브 한 끼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평범하고도 특별한 부부의 밤이었다.
[현재: 샤브샤브 식탁, 그리고 철저한 규칙]
“오늘 밤에는 누나 방 가서 자면 안 되나…. 나 왠지 오늘 밤 되게 외로울 것 같아.”
희수의 목소리에 애절함이 뚝뚝 묻어났습니다.
하지만 서현은 고기를 건져 올리던 젓가락질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호하게 대꾸했습니다.
“안 돼. 오늘 화요일이잖아. 금요일 아니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희수의 입술이 댓 발은 튀어나왔습니다.
23년 차 여름에 혼인신고를 하고, 같은집으로 합친 지도 벌써 1년.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서현이 세운 철저한 '전략적 규칙'이 있었다.
바로 평일에는 각자의 방에서 쉬고,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만 한 침대에서 잠드는 것.
“부부 생활이 거의 뭐…. 동거인도 이것보다 낫겠다.”
희수가 투덜거렸다. 20년 넘게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서현이 제안한 방식이었다.
너무 붙어있으면 공적인 업무 텐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이유였지만, 희수에게는 고문에 가까운 규칙이기도 했다.
“우린 각자의 텐션 관리가 필요한 사람들이짆아. 그러니까 공연 준비 기간에는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해. 그래야 오래가.”
“아니, 남들은 결혼해서 거리감을 좁히는데, 우린 거꾸로 가고 있잖아. 벌써 이렇게 산 지 1년이나 됐는데, 누나 진짜 냉정해.”
희수는 투덜대면서도 서현이 건네준 고기를 낼름 받아먹었다.
사실 이 규칙은 서현의 배려이기도 했다.
공연 준비기간에 더욱 예민해 지는 희수의 수면 질을 보장하고, 회사에서는 완벽한 팀장과 아티스트로 남기 위한 그녀만의 철두철미한 관리법이었다.
“치…. 그럼 금요일은 아직 사흘이나 남았네? 시간 진짜 안 간다.”
“대신 금요일 밤에는 네가 좋아하는 영화 같이 봐줄게. 됐지?”
서현이 선심 쓰듯 말하자 희수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진짜죠? 무르기 없기다. 그럼 오늘 화요일은 내가 설거지할 테니까, 누나는 좀 쉬어.”
희수는 금요일이라는 보상을 약속받자마자 다시 기운을 차렸다.
20년을 함께했어도 여전히 아내와 한 침대를 쓰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남편.
팬들이 본다면 기절할 노릇이었지만, 이 기묘하고도 달콤한 '주말 부부' 같은 일상이 두 사람을 4년째 지탱해 주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식탁 정리를 마친 희수가 고무장갑을 끼고 싱크대 앞에 섰다.
25년 차 국민 가수가 집안일을 하는 모습이 꽤나 능숙했다.
희수는 식탁을 정리하는 서현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금요일에 율 형네서 저녁 먹자던데? 갈 거예요?”
서현는 밥먹은 식탁을 훔치며 어깨로 대답했다.
.
“아니. 혼자 다녀와. 그날 회의가 많아.”
“에이...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래도 시간이 되면 생각해봐요”
서현은 희수 곁으로 다가가, 설거지에 집중하느라 살짝 뒤로 빠진 희수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톡톡. 장난기 섞인 손길이었다.
“어? 정희수 씨, 엉덩이 살 좀 빠진 거 같네? 요즘 공연 연습한다고 운동 덜 하는 거 아니에요?”
희수가 화들짝 놀라며 엉덩이를 앞으로 뺐다.
그러고는 억울한 듯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아... 어제 주영이랑 술 한잔해서 그런가.... 금방 다시 채워 놓을게요.”
하지만 이내 희수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서현의 손길이 싫지 않은 듯, 젖은 손을 닦고 몸을 돌려 서현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 엉덩이가 탐나나 보네? 이렇게 톡톡 쳐주는 거 보면?
누나, 마음 바뀐 거 아니야? 그럼 나 오늘... 누나 방 가서...”
희수가 은근슬쩍 서현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으며 다가오자, 서현이 즉각 눈을 흘기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화요일이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희수는 금세 꼬리를 내렸다.
“아니에요. 농담이야, 농담. 누나 내일 아침에 러닝 갈 때 깨워줄게요..”
서현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희수의 등을 밀어냈습니다.
“(피식) 얼른 설거지나 마저 하세요, 정희수 씨.”
25년 전, 마케팅 수업 시간에 쭈뼛거리며 옆자리에 앉았던 스무 살 청년은 어느덧 능구렁이 같은 남편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내의 눈짓 한 번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거실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홀로 침대에 누워 뒤척이던 희수가 막 잠이 들려던 찰나,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불 끝이 들리더니, 익숙하고 포근한 비누 향이 훅 끼어들었다.
흰 티셔츠에 헐렁한 파자마 차림의 서현이었다. 그녀는 미안한 마음을 숨기듯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희수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희수는 눈을 뜨지 않고도 그 인기척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잠결에도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넓은 품을 열었다.
서현이 그 품 안으로 쏙 들어오자, 희수는 단단한 팔로 그녀를 가두듯 꼭 끌어안으며 팔베개를 해주었다.
“...누나?”
잠겨 있는 낮은 목소리가 서현의 귓가에 울렸다.
희수는 눈을 살며시 뜨며, 품 안의 서현을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결국 왔네. 그래도 잘생긴 남편 옆에 두고 자는 게 좋죠?”
평소 같으면 ‘꿈 깨’라며 밀어냈을 서현이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희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나직이 대답했다.
“그래…. 좋네.”
서현은 희수의 탄탄한 가슴팍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희수의 심장 박동이 서현의 입술을 타고 전해졌다
희수는 서현의 정수리에 턱을 괴고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밖에서는 25년 차 베테랑 아이돌과 철두철미한 팀장일지 몰라도, 어둠이 내린 이 방 안에서만큼은 그저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잘 자요, 내 사랑.”
희수의 낮은 인사와 함께, 두 사람의 화요일 밤은 규칙보다 더 따뜻한 온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새벽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한강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일정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서 달리는 건 검은색 레깅스에 바람막이를 걸친 서현이었다.
1년 전, 체력 관리를 선언한 서현을 따라 희수도 이 루미에라식 ‘독소 배출’ 루틴에 합류했다.
어젯밤 술을 마셨으니 오늘 10km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누나, 같이 가요!”
희수가 속도를 높여 서현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숨이 차오를 법도 한데, 희수는 탄탄한 기초대사량 덕분인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반면 서현은 정면만을 응시하며 고른 호흡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말 시키지 말고 호흡에 집중해. 이제 겨우 4km 왔어.”
“난 괜찮은데. 누나 뒷모습 보면서 뛰니까 하나도 안 힘들어”
희수가 너스레를 떨며 서현의 보폭에 맞췄다.
20년 넘게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다져진 희수의 체력은 확실히 서현보다 우위였지만, 그는 결코 서현을 앞질러 가지 않았다.
항상 그녀의 반 보 뒤, 혹은 바로 옆에서 그림자처럼 자리를 지켰다.
“그래도 오늘 컨디션 좋네. 어제 내 방에 누가 놀러 와준 덕분인가?”
서현이 힐끗 희수를 쳐다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때문이라고?”
“응. 오늘 10km 다 뛰면 누나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내가 쏠게요.”
한강의 일출이 두 사람의 등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2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풍경이었다.
땀방울이 턱 끝으로 맺힐 때쯤, 두 사람은 반환점을 돌아 집으로 향했다.
러닝을 마치고 샤워까지 끝낸 서현이 흐트러짐 없는 정장 차림으로 가방을 챙겼다.
거실로 나오자, 먼저 씻고 나온 희수가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희수는 아직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토스트기에서 갓 구워져 나온 식빵 한 쪽을 접시에 담고 있었다.
“누나, 빵 한 쪽이라도 먹고 가. 빈속에 나가면 내 마음이 아파서 그래.”
희수는 서현의 입에 바삭하게 구워진 빵을 작게 잘라 넣어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컵에 두유를 따랐다.
“자, 두유도 줄게요. 찬 거 마시면 속 베리니까 따뜻하게 데웠어. 먹고 가요.”
서현은 희수가 건네는 따뜻한 컵을 받아들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아침 공기보다 포근했다.
출근 시간 압박에 마음이 급했지만, 자신을 챙기는 희수의 지극한 정성에 서현은 두유 한 컵을 천천히 비워냈다.
“다 마셨어. 고마워, 희수야.”
서현은 가방을 고쳐 매고 현관으로 향하다 말고 돌아서서 희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들어 희수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고마워. 나 먼저 갈게. 사랑해.”
짧은 고백을 남기고 도어록 소리와 함께 서현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희수는 서현이 비운 컵을 만지며 바보처럼 실실 웃음을 흘렸다.
‘사랑해’라는 그 한마디가 아침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희수의 마음을 채웠다.
희수는 서현이 먹다 남긴 빵 조각을 입에 물고, 기분 좋게 자신의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출근과 퇴근은 당연히 각자의 차로 따로 움직였다.
사무실 내에서도 전략 회의나 공식적인 스케줄 논의가 아니면 도통 마주치는 법이 없었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서현은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대신했고, 희수 또한 가볍게 목례만 하고 지나칠 뿐이었다.
“희수 씨, 오늘 오후 연습 잊지 마시고요.”
“네, 서현님.”
지나가는 스태프들이 듣기에는 더없이 건조하고 공적인 온도였다.
간혹 두 사람이 회사 근처 식당에서 마주앉아 밥을 먹는 일도 있었지만, 그 광경을 목격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5년을 함께한 아티스트와 스태프라면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밥 한 끼 먹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으니까.
“이번 컨셉 시안 확인해 보셨어요?”
서현이 태블릿을 넘기며 묻자, 희수는 밥알을 씹으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3번 시안이 이번 곡 분위기랑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안무 팀 의견도 물어봐야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일밖에 모르는 홍보 팀장과 프로페셔널한 메인보컬의 업무 오찬으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식탁 아래,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 희수의 발끝이 서현의 구두 끝을 장난스럽게 툭, 건드렸다.
서현의 미간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표정을 관리했다.
‘정희수, 적당히 해.’
눈빛으로 쏘아붙이는 서현에게 희수는 그저 시원하게 물 한 잔을 들이켜며 여유로운 미소를 보냈다.
집에서는 빵을 굽고 두유를 데워주며 사랑을 속삭이던 정희수와, 그의 볼에 뽀뽀를 남기던 이서현은 그곳에 없었다.
20년의 세월 동안 그들이 완벽하게 구축해 온 ‘비즈니스 온도’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가장 완벽한 위장이었다.
25주년 콘서트를 앞두고 예민해진 리더 율이 멤버들을 긴급 소집했다.
율의 집 거실,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평소보다 날 선 율의 목소리가 멤버들의 귀에 박혔다.
“너희들 요즘 왜 이렇게 해이해졌어? 팀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 이유가 뭐야? 다들 연애라도 하는 거야?”
율의 시선이 멤버들을 훑었다.
다들 눈치만 보며 입을 꾹 닫고 있을 때, 유독 초조하게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던 희수가 갑자기 캔 하나를 통째로 원샷했다.
‘탁’ 소리가 나게 캔을 내려놓은 희수의 눈빛이 묘하게 번뜩였다.
“연애? 아니, 난 연애 같은 거 안 해.”
희수의 대답에 율이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떴다.
그 순간, 희수의 입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폭탄이 투하되었다.
“나, 할말있어. 서현님이랑... 음... 정확히 말하면 우리 연애 아니고 결혼했어. 부부라고.”
순식간에 거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율은 마시려던 술잔을 공중에 멈췄고, 다른 멤버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희수를 바라보았다.
루미에라 컴퍼니에 입사한지 5년 넘게 '일밖에 모르는 독사 팀장'이라 불리던 서현과, 팀 내 최고의 스타인 희수가 부부라니.
“...정희수,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누구랑 결혼했다고?”
“이서현. 이서현 팀장님. 우리 이미 혼인신고도 끝냈고 한 집에서 살아. 율이 형, 형이 존중하는 그 서현 님이 내 아내라고.”
희수는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듯 등을 기대며 씩 웃었다.
20년 전 마케팅 수업 때부터 시작된 짝사랑, 군대에서의 기다림, 그리고 20주년 옥상에서의 키스와 21년 차의 술김 어린 청혼까지.
그 모든 비밀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가 루미에라의 심장부에서 완벽하게 열려버린 순간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그걸 왜 이제 말해!”
주영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희수는 여유롭게 손을 저었다.
“말했잖아, 서현 님이 실세라고. 아내 허락 없이는 나도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
근데 형이 해이해졌냐고 묻길래 대답한 거야.
난 지금 인생에서 제일 열심히 살고 있거든. 아내한테 잘 보이려고.”
그날 밤, 율의 집은 축하보다 비명과 취조로 가득 찼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차갑고 우아한 모습으로 출근한 서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젯밤의 폭로를 전해 들은 율의 '비상 소집' 통보였다.
율은 머리를 짚으며 책상 위에 놓인 가편집본 기획안을 톡톡 쳤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앞에 앉은 서현을 바라봤다.
“와… 서현 누.. 아니 서현CP님 어제 희수가 얘기를 하긴 했는데, 누나 아니 서현CP님 의견도 들어봐야 할것 같아서 불렀어요"
"얼마전에 다큐멘터리에 희수가 인터뷰에 넣겠다고 한 그 ‘사랑한다’는 고백, 그것도 다 누나도 알고 있었어요?”
율의 황당한 질문에도 서현은 서류를 정리하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서현에게 율은 루미에라컴퍼니의 대표, 그리고 자신이 관리하는 아티스트.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심하게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음.. 나도 어제 편집실에서 보고 알았어.”
옆에 앉아 눈치를 보던 희수가 이때다 싶어 서현의 팔을 슬쩍 잡으며 끼어들었다.
“나 진짜 진심이라니까? 이제 멤버들도 다 알았고, 형도 알았는데… 이제 우리 안에서는 좀 당당해도 되는 거 아니야?”
희수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회사 복도에서 눈만 마주쳐도 웃고 싶고, 율이 형 앞에서도 “우리 와이프가 최고지”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서현의 대답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아니. 절대 안 돼. 비밀이야.”
“아니, 왜요! 다들 아는데!”
“멤버들이 아는 거랑, 회사 스태프들이나 팬들이 아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야.
25주년 공연 끝날 때까지 내 전략은 변함없어. 공과 사 확실히 해, 정희수 씨.”
희수의 어깨가 순식간에 눈에 띄게 축 늘어졌습니다.
율은 그런 희수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정희수, 너 진짜 고생길 훤하다. 서현 누나 성격에 집에서도 이러면 너 숨은 쉬고 사냐?”
희수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집에선 안 그래요. 형이 뭘 알아. 누나가 나한테 얼마나 다정한데….”
희수는 짐짓 투덜거렸지만, 마음 한편으론 안도했다.
비록 회사에선 여전히 ‘스태프’와 ‘아티스트’로 남아야 하지만, 퇴근 후에 현관문을 열면 자신을 반겨줄 다정한 ‘내 여자’ 서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현은 그런 두 남자를 뒤로하고 일어섰습니다.
“율대표는 다음 회의 준비하고. 그리고 희수, 너는 연습실로 가. 농땡이 피우지 말고.”
철저한 전략가 서현의 명령에 희수는 억울한 듯 발을 굴리면서도, 결국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의 비밀은 예상치 못한 슬픔의 자리에서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철저한 전략가인 서현조차 계산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족의 이별이라는 거대한 슬픔 앞에서 희수의 진심은 결국 위장을 이겨버렸다.
서현의 외조부상 비보가 전해졌을 때, 해외에 거주하던 서현의 부모님은 당장 입국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텅 빈 빈소를 지켜야 하는 서현의 곁을 가장 먼저 지킨 건 희수였다.
평소라면 이서현 팀장의 개인사라며 거리를 두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검은 상복을 갖춰 입은 희수는 서현을 대신해 조문객을 맞이하고, 사위로서 상주의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우연히 장례식장의 다른 빈소를 찾은 일부 팬들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20년 넘게 함께한 아티스트가 팀장의 조부상에서 상주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평범한 동료 사이를 넘어선 것이었다.
기운 없이 슬픔에 가득 찬 서현을 희수는 온몸으로 지탱했다.
뒤늦게 도착한 서현의 부모님께도 그는 깍듯하고 믿음직한 사위의 모습을 보였다.
화장이 진행되던 공원 묘역에서도 서현을 지키는 건 오직 희수였다.
차가운 바람에 서현이 떨면 자신의 옷을 벗어 어깨에 덮어주고, 무너져 내리는 그녀의 손을 꼭 맞잡아 온기를 전했다.
그 헌신적인 모습은 여러 팬들에게 루머가 아닌 사실확인이 되기 충분했다.
결국 이 일은 팬들 사이에서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희수가 보여준 지극정성인 외조 덕분에 두 사람의 관계는 큰 거부감 없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졌다.
다만 서현의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팬들에게는 결혼 사실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대신 약 2년 정도 진지하게 연애 중인 사이로 공식 발표가 되었다.
희수는 내심 우리 부부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서현의 뜻에 따라 기꺼이 든든한 남자친구의 가면을 썼다.
슬픔 속에서 피어난 진심 덕분에 두 사람은 이제 팬들의 축복을 받는 공식 커플이 되었다.
25주년 콘서트 전날, 리허설 현장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의상 체크를 모두 마쳤지만 정희수는 어딘지 모르게 임팩트가 부족하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25주년이라는 무게감에 걸맞은 강렬한 한 방이 필요했다.
고민에 빠진 희수에게 다가온 것은 역시나 그의 영원한 전략가 서현이었다.
그녀는 무심한 듯 날카로운 신의 한 수를 던졌다.
“그럼 율이랑 주영이가 시스루 입을 때, 너는 그냥 셔츠 앞섶을 뜯어버려. 단추가 무대 바닥으로 우두둑 떨어지게. 어때?”
서현의 파격적인 제안에 희수는 당황한 듯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아… 나 요즘 상체 운동 좀 소홀히 해서 자신이 없는데….”
희수의 엄살에 서현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대못을 박았다.
“이미 완벽해. 대신 계획된 게 아니라 즉흥적인 퍼포먼스처럼 보여야 해. 그래야 객석이 뒤집어지지.”
서현의 확신에 찬 아이디어는 곧장 실행에 옮겨졌다.
그리고 대망의 콘서트 당일,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미드나잇 (Midnight)’ 무대 중간이었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멤버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재킷을 벗어 던졌다.
그 찰나의 정적 속에서 희수는 서현의 조언대로 셔츠 앞섶을 움켜쥐고 단단히 힘을 주어 뜯어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단추들이 무대 위로 흩뿌려졌고, 조명 아래 희수의 탄탄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25년 차라고는 믿기지 않는 완벽한 피지컬에 공연장은 비명에 가까운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이 장면은 순식간에 직캠으로 퍼져나갔고, SNS 실시간 트렌드는 ‘정희수 셔츠’, ‘루미에라 25주년’으로 도배되었다.
팬들은 실시간으로 뒤집어졌고, 무대 뒤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서현은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역시 자신의 남편이자 최고의 아티스트인 희수를 어떻게 활용해야 대중이 열광하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콘서트의 열기가 여전히 식지 않은 그날 밤, 두 사람의 침실은 무대 위 함성 대신 고요하고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찼다.
공연의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희수에게는 피곤함보다 제 여자의 품속에 파고드는 시간이 훨씬 소중했다.
서현이 이토록 순순히 자신을 내어주는 날이 흔치 않았기에, 희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희수는 서현의 품에 얼굴을 묻고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 난 소원이 없다….
루미엘도 이제 우리 사이를 알게 됐고, 25주년 콘서트도 무사히 마쳤고….
무엇보다 지금 누나 품에 내가 있잖아. 더 바랄 게 없다.”
희수는 만족스러운 듯 깊은 숨을 내뱉더니, 슬며시 눈을 뜨고 서현의 반응을 살피며 덧붙였다.
“진짜 소원이 하나 더 있다면…. 우리 이제 매일 같이 자면 안 될까?”
진심 섞인 희수의 응석에 서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이불 속에서 희수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건 좀 더 고민해 볼게.”
단호한 듯하면서도 끝을 흐리는 서현의 대답에 그녀의 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25년을 돌아 마침내 온전한 서로의 편이 된 두 사람에게, 이 밤은 그 어떤 화려한 조명보다 찬란하고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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