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임/끄적임의 정도

[웹소설/습작] 이클립스 (ECLIPSE)

천진한 낭만 토끼 2025. 12. 14. 11:18

루미에라(LUMIERA). 데뷔 2년 차 남자 아이돌 그룹의 리더 송율(20).
스무 살의 율이 느끼는 현실은 차가웠다.
2년 동안 그들을 찾아주는 이들은 고작 수십 명으로 똘똘 뭉친 팬덤, ‘루미엘’뿐이었다.
 
물론 공연과 무대 스케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중에게 루미에라는 여전히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들의 시간은 인지도가 없는 자리에서 정체되어 흐르고 있었다.


‘아이돌 현장은 한국이 최고지.’
“엄마! 나 한국 가! 다녀올게… 아니, 어쩌면 안 올지도 몰라!”
무작정 편지 한 장을 써두고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날아온 정수안.
명문 해외 대학을 졸업한 인재였지만, 지금 그녀는 꿈을 좇아 공연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하며 실무를 익히고 있었다.
공연 기획자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눈으로, 몸으로 현장을 흡수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비 오는 어느 날.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빗줄기는 거세졌지만, 주최 측은 행사를 취소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는 송율이 서 있었고, 무대 아래에는 수안이 서 있었다.
노래 중반, 격렬한 퍼포먼스 도중 빗물에 중심을 잃은 율이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는 과정에서 엉덩방아를 찧었고, 뒷 허리춤에 차고 있던 인이어 팩에 허리를 세게 찍혔다. 밝은 색 의상 위로 붉은 핏자국이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선명한 상처의 흔적이었다. 수안은 안타까움에 숨을 멈췄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율은 고통에 허리를 잡고 찡그렸지만, 곧 스태프 한 명 한 명에게 허리를 숙이며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게 아닌가.
그 무리 속에 수안도 있었다. 수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루미에라.’
 
수안은 그 한 번의 무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율의 모습을 자신의 ‘최애’로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 그룹이 최고의 아이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젠가 내가 능력 있는 공연 기획자가 되면, 오늘처럼 위험하게 공연하는 일… 만들지 않을게요. 그때까지 꼭 활동해 줘요…’


 
루미에라는 데뷔 3년 차에 접어들었고, 율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 되었다.
여전히 인지도는 그 자리에 머물렀다. 무대보다 학업을 병행하며 실기 무대에 서는 날이 더 많았다.
루미에라의 소속사는 빠르게 결정했다.
한창 전성기에 군대로 이탈하는 것보다, 차라리 인지도가 낮을 때 병역을 해결하자는 제안을 멤버들이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율도 '언제 뜰지도 모르는데, 아니 어쩌면 영원히 망할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군대나 다녀오자.'라고 생각했다.
율을 시작으로, 막내 석현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멤버들은 대학 입학과 휴학을 거쳐 빠르게 병역 의무를 시작하고 진행 중이었다.

 
그 시간, 수안은 현장 아르바이트를 거쳐 자신의 스펙으로 운 좋게 대형 공연 기획사 공채에 입사했다.
그녀는 현장에서 익힌 감각을 실무에 적용하며 클라이언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때 회사 내부에서는 그녀의 예쁘장한 외모가 프로젝트 수주에 도움이 된다는 루머도 돌았지만, 이는 잠시. 브랜드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진 수안은 이제 공연 기획팀의 서브 디렉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사이 잊고 있던 루미에라의 송율이 전역했다. 율의 나이는 스물셋. 막내라인 석진이와 석현이는 군 복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한 살 어린 동생 희수와 주영이도 제대가 코앞이었다. 동생들이 병역 의무를 마칠 동안에도 루미에라를 찾는 사람들은 없었고, 그 사이 율과 주영, 희수는 학업에 집중했다. 루미에라 컴퍼니 대표 준석의 뜻에 따라 마치 꼭두각시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데뷔 7년 차. 석현이가 드디어 제대했고, 루미에라의 첫 번째 싱글 앨범 타이틀곡 ‘이클립스(ECLIPSE)’가 드라마 삽입곡으로 20초 나오면서, 숨듣명(=숨어서 듣는 명곡) 반열에 오르며 역주행이 되었다. 곡이 나온 지 4년 만이었다. 루미에라도 이름처럼 빛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역주행을 통해 인기 아이돌 그룹 반열에 오른 루미에라. 리더 율은 여전히 자신들의 인기를 믿지 못하며, 빗물에 미끄러졌던 그 무대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늘 인사성 바르던 율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해, 수안은 가장 큰 연말 시상식 행사의 서브 디렉터로 참여했다.
가장 화려하면서도, 얇은 의상을 입고 맨발 퍼포먼스를 해도 춥지 않을 만큼 완벽한 무대 설계로 아티스트들의 호평을 받은 무대, 그 중심에 수안이 있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긴장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갈 법도 한데, 오늘 같은 날은 자축과 북적임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단골로 종종 방문하는 일본식 선술집을 찾았다.
"사장님, 늘 먹던 술과 꼬치 4조각, 오뎅탕 하나 주세요."
오늘은 혼자지만 안주도 넉넉하게 시키고 싶었다. 12월 31일이었다.
 
그때, 율 또한 행사가 끝난 후 아무도 없는 숙소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무얼 해야 할지 몰라 회사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선술집을 찾아왔다.
칸막이로 된 좌석, 두루 즐길 수 있는 좌석으로 구성된 구조의 술집이라 각자 공간에서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율에게 '혼술'은 낯선 단어였다.
혼자 술을 마셔본 적도,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뭐… 인기가 있어도 12월 31일… 혼자 있는 건 똑같네. 뭐 다르지 않네… 맥주나 한잔하고 가서 자야겠다.’
 
"사장님, 맥주 하나랑 오뎅탕 주세요."
"송율 씨 아니에요? 멤버들은 어디 가고 혼자 왔어요?"
"네, 그러게요. 오늘은 아무도 없이 그렇게 됐어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오늘 좀 밀려서… 미안하니까 이거 (핑거 스낵을 가져다주며) 먹으면서 기다려줘요."
"네, 괜찮아요. 시간 많아요." 라며 가게의 분위기를 살피는 율.
 
‘그러게, 오늘 사람 많네…’
 
그런데 구석에서 혼자 소주를 따라 마시는 수안을 발견했다.
 
‘우리 공연 스태프 누나 같은데?’
 
율은 자리를 옮겨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율: "저기… 안녕하세요. 예전에 루미에라 현장 스태프 누나 맞죠?”
 
수안: "어?!"

 
율: "혹시 혼자시면… 저, 합석해도 될까요?"
수안: "엇?… 네. 그러세요."
 
"사장님, 주문한 거 이쪽 테이블로 주세요."
"수안 씨랑 합석했네. 안 그래도 대기 손님 있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고마워요, 율 씨."
 
술이 한 잔, 두 잔 오가며…
"누나, 저는… 인기가 있으면 오늘 같은 날은 사람들과 왁자지껄하게 보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니네요. 인기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똑같네요."
 
라는 율의 이야기를 듣고 술을 들이켜며 수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요즘 현장에 안 보이던데요? 다른 일 하세요?"라고 율이 물었다.
 
"요즘은 공연 기획사에서 일해요. 오늘 있던 공연 서브 디렉터로 참여했어요."
"아… 그러시구나. 오늘 춤추는데 눈 오는데도 안 미끄럽던데요. 누나 작품이구나… (헤롱헤롱)"
 
더운 공기에 취기가 오른 율.
수안의 앞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술잔을 손바닥으로 덮고서는 고개를 떨구고 잠든 듯했다.
 
벌써 오래전에 받아 둔 율의 매니저, 준혁의 연락처.
번호가 바뀌지 않길 바라며 준혁에게 걸었지만, 자동 음성 메시지로만 연결되고 전화를 받진 않았다.
다행히 가진 번호가 준혁의 번호로 확인되어 안심했다.
 
‘아… 얘는 왜 또 술이 약해. 왜 준혁 씨는 전화를 안 받아… 하…. 일단 데리고 가야겠다.’
 
수안은 만취한 율을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왔다.
침대에 율을 눕히고 양말만 가볍게 벗겨준 후, 자신은 거실 소파 위에서 몸을 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벽 4시쯤. 율이 술이 덜 깬 상태로 잠에서 깼다.
 
‘어? 뭐야? 나 납치당한 건가? … 아… 덮침 당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 여기 어디지?’
 
제일 먼저 찾는 건 자신의 핸드폰의 부재중 전화… 매니저나 멤버는 없었다.
율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섰다.
거실 소파 위에는 누군가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얇은 담요 한 장 덮고, 웅크린 자세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있는 사람. 수안이었다.
 
율은 소파로 다가갔다.
잠든 수안의 모습은 무대 뒤에서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맑고 깨끗했고,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연약해 보였다.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불쑥, 예상치 못한 감정이 튀어나왔다.
 
‘아… 예쁘다.’
 
아이돌 생활 7년 동안, 수많은 화려한 여성들을 무대 위와 방송국에서 봐왔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늘 완벽한 무대나 카메라 동선, 그리고 동료 멤버들뿐이었다.
여성에 대해 이토록 강렬하고 순수한 '예쁘다'는 감정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침. 수안은 루미에라 매니저인 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안: "안녕하세요. 루미에라 송율 씨 매니저님이시죠? 저는 예전에 루미라기획 정수안입니다."
준혁: "아.. 네, 무슨 일이시죠??"
수안: "송율 씨가 저희 집에 있어요. 어제 우연히 술집에서 만났는데, 취해서 일단 데리고 왔어요. 율 씨 귀가 좀 부탁드릴게요."
준혁: "아… 율이가 거기 있군요. 어디시죠?"
수안: "아, 여기 반포동이에요. 주소 드릴게요."
 
그리고 율을 깨우러 방에 들어섰다.
그 사이 율은 옷을 벗고 잤는지, 드러난 상체에 비해 잠든 얼굴이 아기 같은 모습이었다.
수안은 잠시 심쿵했다가 이성을 차렸다.
 
수안: "율 씨, 송율 씨? 매니저님 오신대요. 집에 가야죠."
 
그 말에 율은 잠결에 수안을 와락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5분만 더..."
 
수안은 놀라 율을 밀쳤다.
율은 늘 숙소에서 멤버들이 깨우면 ‘10분만 더, 5분만 더’라며 깨우는 멤버들을 습관처럼 당기곤 했다.
수안에게도 잠결에 똑같이 행동했을 뿐이었다.
수안은 놀라 율을 밀쳐냈지만,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율을 다시 흔들어 깨웠다.
 
"율 씨, 송율 씨. 일어나세요. 집에 가셔야죠."
낯선 여자 목소리에 율이 눈을 번쩍 떴다.
"헛, 매니저인 줄 알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율은 황급히 자신의 몸을 이불로 가리며 사과했고, 수안은 붉어진 얼굴로 헝클어진 옷을 정리했다.
"괜찮아요. 빨리 옷 입고 준비하세요. 매니저님 곧 올 거예요."

 수안은 황급히 방을 나왔지만, 가슴은 쿵쾅거렸다.
데뷔 2년 차 때부터 익명의 팬으로 지켜봤던 최애와의 예상치 못한 신체 접촉.
그것도 그가 무방비한 잠결에. 평생 잊을 수 없을 듯한 강렬한 사적 경험이었다.
 
잠시 후, 율은 옷을 갖춰 입고 거실로 나왔다.
그는 여전히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누나, 정말 죄송해요. 어젯밤 일도, 아침에 행동도…"
율은 부끄럽고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했다.
수안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매니저 준혁이었다.
율은 급히 짐을 챙기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서서 수안을 바라봤다.
순간,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호한 눈빛이 스쳤다.
"누나. 저, 이거. 제 개인 번호예요. 오늘의 일에 보답하고 싶은데, 꼭 연락 주세요."
 
매니저 준혁과 함께 황급히 집을 나선 송율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수안은 현관에 기대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율이 직접 입력하고 저장한 이름, ‘송율’과 그의 개인 번호가 찍혀 있었다.
수안은 어딘가 허탈했다. 율은 자신의 번호를 알려줬을 뿐, 수안의 번호를 수안에게 직접 받아가진 않았다.


 ‘이걸 나보고 전화하라고?.. 전화를 하면 받는다는건가? 내 번호도 모르면서..'

'아, 송율. 그렇게 안 봤는데.. 너도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구나.
연예인은 다 이런 식으로 번호를 막 주고 다니나? 요정은 무슨… 송율도 똑같네.’
 
그녀는 침대에 눕혀졌던 율의 체취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방을 힐끗 보았다.
그가 잠결에 옷을 벗고 잤던 침대. 그리고…
 
‘아, 미쳤나 봐!’
 
수안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침, 율이 잠결에 자신을 품에 당기던 그 순간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따뜻한 체온, 단단한 팔, 그리고 그의 품으로 끌어당겨지는 짧은 순간의 충격.
그것은 단순한 잠꼬대였을지라도, 수안에게는 그 어떤 팬 이벤트보다 강렬한 사적인 경험이었다.
 
스태프와 아이돌이라는 공적인 선을, 율이 무의식 중에 ‘습관’으로 넘어버린 것이다.
그 순간의 생생함이 율이 자신에게 번호를 알려주고 떠난 지금의 씁쓸함이 남았다.
팬심이 흔들렸다.
그 자리에는 ‘남자 송율’에 대한 강렬하고 순수한 이성적 의식이 들어섰다.
 
같은 시간, 루미에라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
율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숙취 때문에 머리는 아팠지만, 소파에서 잠든 수안의 얼굴을 보며 느꼈던 ‘예쁘다’는 강렬한 첫인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형."
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 율아. 너 진짜… 애들처럼 집에 간 줄 알았더니…"
"내가 집이 어딨어."
"아… 미안… 여하튼… 큰일 날 뻔했어."
"정수안 씨 아니었으면 길바닥에서 발견될 뻔했잖아. 그나저나 수안 씨 되게 고맙더라, 바로 나한테 너 데리고 가라고 전화도 해주고. 그런데… 너 정수안 씨랑 아는 사이였어?"
 
준혁이 운전하며 물었다. 율은 망설이다 둘러댔다.
 
“아뇨. 어제 우리 가끔 가는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정말 그게 다야?”
준혁의 질문은 듣지 못한 채 온통 수안 생각뿐이었다.
 
‘수안 누나… 연락이 올까?’
 
“형, 정수안 씨에 대해 알아봐 줄 수 있어요? 남자친구 있는지도..”
율이 물었다. 준혁은 운전 중이었지만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수안 씨? 요즘은 공연 기획 쪽으로는 신예인데, 감각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해. 기회가 되면 회사로 스카우트 제의한다고 대표님이 그러더라. 그나저나 너… 수안 씨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지? 남자친구 있는지는 왜 물어?”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어제 저한테 그렇게까지 폐를 끼쳐가면서 챙겨줬는데, 남자친구가 알면 오해할 수도 있잖아요.”
 
율은 어설프게 변명했지만,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준혁은 룸미러로 율의 얼굴을 살폈다.
아이돌로 살아온 율이 사적인 감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근데 또.. 뭐… 딴마음.. 품을 수도 있고. 형, 연애 당장 하겠다는 거 아니에요.”
율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 몰래 연애 좀 해도 돼요?”
 
준혁은 차를 갓길에 세웠다.
 
“안 돼. 아직 20대야. 그동안 고생하고 이제 뜨기 시작했는데, 안 돼. 생각조차 하지 마.”
 
율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준혁의 말이 곧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 4시에 느꼈던 포근함과, 예쁘다는 충동적인 감정,
그리고 잠결에 그녀를 끌어안았을 때의 그 기묘한 충만함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 만약에요, 형. 만약에 제가 그 누나를 진짜 좋아하게 되면요?”
 “그럼 안 돼. 내가 막을 거야.” 준혁은 단호했다.
 
하지만 율은 이미 답을 정한 듯했다. 그는 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만 알아봐 줘요.”
 
준혁은 율의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다.
7년간 묵묵히 시키는 대로만 하던 율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건 처음이었다.
 
“하… 알았어. 알아보는 시늉만 할게. 그리고 네 마음 다 잡을 때까지만 이야.”
 
율은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형.”


같은 시간, 수안의 집.
수안은 소파에 멍하니 앉아 율이 남긴 개인 연락처를 바라봤다.
'실망'과 '설렘'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했다.
그녀는 그에게 전화할 용기가 없었다.
스태프와 아이돌이라는 선을 넘는 순간, 그녀가 7년간 쌓아온 커리어와 그녀의 소중한 '최애'를 잃을 수도 있었다.
 
'전화하지 마… 그냥 지워. 어쩌다 생긴 해프닝일 뿐이야.'
 
수안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자꾸만 그의 번호 위를 맴돌았다.
 
‘내 번호는 알지도 못하는데… 갖고 있어 봤자…….’
 
번호 삭제 버튼에 손이 올라갔지만, 차마 지울 수 없었다.
혹시라도 공적인 업무로 인해 다시 찾게 될 수도 있으니까.
수안은 지극히 공적인 이유라는 핑계를 대며 번호를 휴대전화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그날 이후 율의 세상은 정수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휴대폰을 확인했다. 혹시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을까..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림 창도, 전화도 조용했다.
다만, 준혁의 업무 스케줄과 멤버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 좀 해달라는 위치 관련된 내용들 뿐.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수안의 메시지는 단 한 개도 도착하지 않았다. 

수안도  율을 오해하고 있던 것.. 자신의 핸드폰의 통화목록을 확인하다가 모르는 번호가 하나 찍혀 있었다.
저장되지 않은 발신된 번호. 날짜와 시간을 보니 그 번호가 율이 번호였던 것. '.. 이 번호가 송율 번호네..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했구나.. 이 오해를 풀긴 해야 하는데. 이미 한 달 넘게 지났는데, 이제야 연락하기엔 조금 그렇지..'라는 생각하던 찰나 넘어질 뻔하며 핸드폰이 지나가는 차량에 밟히고, 부서진 핸드폰이 하수구에 밀려 들어가 버렸다. 이후에 핸드폰을 다시 되찾았지만, 오염수에 의해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 그렇게 율의 핸드폰 번호와 수안의 소중한 추억은 핸드폰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K-POP 가수들이 총 출동하는 어느 페스티벌 현장에서 수안을 만났다. 
율은 수안에게 반갑게 인사했지만, 수안은 율에게 VIP에게 인사하듯 깍듯하게 인사했다.
율을 피하려는 수안을 율이 붙잡았다. 
“잠시만요, 누나.”
수안은 깜짝 놀라 뒤돌아섰지만, 주변 시선을 의식해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율 씨, 지금 저 근무 중이에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율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주변 인적이 드문, 조명이 희미한 통로로 빠르게 이동했다.
수안이 이끌려 오자, 그는 손을 놓았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율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누나. 저는 진짜 반가운데… 누나는 나 하나도 안 반가운 거 같네요?”
 
율의 목소리에는 서운함과 함께 오랫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묻어났다.
“우리가 막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이거 해명도 하고, 풀어야 하는데. 누나는 계속 나 피하기만 하고.”
수안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오해했던 진실을 알고 있는 이상, 율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율은 한 걸음 더 다가가 그녀의 어깨너머로 말을 이었다.
 
“그보다 나… 누나 너무 보고 싶었는데.”
 
그의 고백에 수안은 숨을 멈췄다.
아이돌 송율의 팬이 아니라, 남자 송율의 진심 어린 보고 싶었다는 말이었다.
 
“그 선술집엔 왜 안 와요? 나는 누나 다시 올까 봐, 몇 번이나 혼자 찾아가서 기다렸는데….”
율의 말에는 꾸밈없는 솔직함이 담겨 있었다.
수안은 그가 자신에게 번호를 준 것이 가벼운 유혹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시 만나고 싶었다는 뜻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자신이 오해하고 거절했던 시간 동안, 율은 그녀가 다시 오기를 바라며 그녀의 단골 선술집에 홀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안은 미안함과 동시에, 팬심이 아닌 이성적인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율의 눈빛은 무대 위에서 볼 수 없는, 생생한 스물다섯 남자의 솔직한 감정이었다.
 
그때, 수안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전기에서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안 님, A구역 클라이언트 이동 동선 점검 들어갈게요.! 즉시 복귀해 주세요! 오버.”
 
수안은 무전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업무 모드'로 돌아왔다. 지금은 사적인 감정이나 오해를 풀 시간이 아니었다.
“죄송해요, 율 씨. 저 지금 당장 가봐야 해요. 업무 중이라서요.”
 
수안은 황급히 돌아서려 했지만, 율의 단호한 눈빛이 그녀를 붙잡았다.
율은 지금 놓치면 또다시 그녀를 몇 달 동안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잠깐만요, 누나. 그럼 언제 볼 수 있어요?” 율이 재촉했다.
수안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첫 만남'의 장소를 떠올렸다.
“알겠어요. 다음 주 토요일 밤 11시. 그때 그 선술집에서 잠깐 만나요. 그때… 그때 얘기해요.”
수안은 더 이상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율의 손을 피해 급히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그때 오해만 풀자. 그럼 되겠지.'
수안은 근무지로 달려가면서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토요일이 다가올수록 율은 잠을 설쳤다.
지난 몇 달 동안 수안에게 느꼈던 미안함, 오해, 그리고 보고 싶었던 감정들이 토요일 밤 11시에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는 단순한 '오해 풀기'가 아닌, 두 사람의 관계를 시작하는 첫 데이트라고 확신했다.
율은 평소 무대 의상이나 방송 의상과는 다른, 자연스러우면서도 멋진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스타일을 준비했다.
잘 맞는 블랙 진에 고급스러운 소재의 아이보리 니트를 걸쳤다.
새로 산 묵직하고 은은한 향수를 목덜미와 손목에 조심스럽게 뿌렸다.
수안에게  '남자 송율'로서의 첫인상이 완벽하기를 바랐다.
 
토요일밤, 밤 10시쯤 숙소를 나서는 율을 보며 멤버들이 한 마디씩 했다.
“와, 율이 형. 토요일 밤 10시에 풀착장이네? 미팅이야, 데이트야?” 막내 석현이가 능글맞게 물었다.
주영도 거들었다. “얼굴에서 광이 나요. 리더님, 여자 만나러 가는 건가? ”
율은 부끄러움이 가득한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응. 데이트 맞아. 성공하길 빌어줘..”
 
율은 약속 시간 15분 전, 선술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완벽한지 확인했다.
'오해는 풀고, 오늘은 꼭 누나랑 조금 가까워져야지.' 그의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한편, 수안의 토요일은 긴장의 연속이었던 지난주와 달리 한없이 평화로웠다.
그녀는 주말 내내 밀린 잠을 자고, 집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수안은 침대에 누워 드라마를 보며 뒹굴거렸다. 머릿속에는 오직 편안함뿐이었다.
율과의 다급했던 약속은 업무가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30분. 수안은 습관적으로 폰 캘린더를 확인했다가, 몇 주 전 스스로 입력해 둔 알림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D-DAY: 토 11 PM / 송율 선술집 오해 해소]
 
“미쳤나 봐! 약속 30분 전이잖아!”
수안은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튕겨져 나왔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완벽한 민낯이었다.
화장할 시간도, 제대로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다.
그녀는 결국 집에서 편하게 입는 복장 그대로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수안은 얇은 끈 민소매 티셔츠 위에 큼직한 후드 집업, 회식 트레이닝 바지, 민낯에 집에서 쓰는 동글한 테의 안경을 착용하고 급하게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밤 11시 정각.
새 향수 냄새와 설렘으로 무장한 송율은 선술집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수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숨을 헐떡이는 여자가 들어섰다.
운동복 바지에 슬리퍼, 후드 집업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안경을 쓴 채 어딘가 잔뜩 지친 모습.
마치 '방금 막 잠에서 깨 집 앞 편의점에 온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수안은 율을 발견하자마자 발을 멈췄다.
완벽하게 '꾸안꾸' 스타일을 소화한, 조각 같은 얼굴의 율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안은 황급히 후드 집업의 끈을 당겨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
율은 처음에는 낯선 사람인 줄 알았다가, 이내 수안임을 알아보고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가 예상했던 '프로페셔널하고 냉철한 디렉터 정수안'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지극히 사적이고, 편안하며, 어딘가 허술한 모습이었다.
율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예쁘다.'

 

아니, '예쁘다'를 넘어선 '귀엽다'는 감정이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느껴졌던 순수함이 다시 한번 그를 강타했다.
 
선술집 안쪽  구석. 칸막이 좌석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데 4인용 테이블 좌석에 율과 수안이 마주 보고 앉았다.
율은 자신이 꿈꿔왔던 완벽한 '첫 만남'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정수안을 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율은 곧 평정심을 되찾고,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를 맞았다.

 

“오셨네요? 안 오는 줄 알고… 그냥 갈 뻔했는데.”

 

율은 진심이 반, 놀리는 마음이 반 담긴 미소를 지었다.
수안은 율의 완벽한 모습과 자신의 처참한(?) 모습의 대비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뛰어나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 위에 놓인 물 잔을 집어 벌컥 들이켰다.

 

“후우… 약속이니까요.”

 

수안은 더운 공기에 후드 집업을 살짝 내려 펄럭이며 열기를 식혔다.
그녀의 행동에는 어떠한 꾸밈이나 긴장감도 없었다. 오직 '오해를 풀러 왔다'는 단 하나의 목적만 남아 있는 듯했다.

 

“율 씨 뭐 먹을래요? 여긴 제가 살게요.” 수안이 다 마신 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율이 황급히 지갑을 찾으려 하자, 수안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럼 더치페이. 제가 알아서 시킬게요. 사장님! 늘 먹던 걸로 주세요!”

 

수안은 율과의 대화보다 안주 주문이 더 급하다는 듯, 여전히 숨이 덜 진정된 목소리로 사장님께 외쳤다.
그 모습은 '루미에라 송율'이라는 톱 아이돌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솔직함 그 자체였다.

 

율의 눈앞에 있는 수안은 여느 여자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거나 대시했던 모든 여성들은 늘 완벽하게 자신을 꾸미고,

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긴장하며 말을 가렸다.
하지만 내 앞에 앉은 여자, 정수안은 달랐다.
운동복에 안경, 민낯. 끈 민소매가 비치는 후드 집업을 입고 물을 벌컥 마시더니,

돈 문제도 칼같이 더치페이로 정리하고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안주를 율에게 의견조차 묻지 않고 주문해 버렸다.
그녀의 털털함과 꾸밈없는 모습, 그리고 긴장해서 허둥대는 모습까지도 율에게는 전부 새롭게 다가왔다.

 

‘이 누나는 나한테 잘 보일 생각이 1도 없구나.’
 
이 사실이 율에게는 역설적으로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그녀의 진심이 그만큼 더 투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율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수안을 바라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맑은 눈빛, 물을 마시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급하게 뛰어오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볼…
이 모든 것이 '아이돌 송율'이 아닌, '남자 송율'을 설레게 했다.
그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고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피식 새어 나오는 미소를 막을 수 없었다.

 

“귀엽다….”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율의 말은 선술집의 소음 속으로 파묻혔다.
수안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사장님이 가져다준 핑거 스낵을 집어 먹으며 입을 열었다.

 

“율 씨, 제가 먼저 사과할게요.”

 

수안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드디어 오해를 풀 시간이었다.
안주가 나오기 전, 사장님이 먼저 오뎅탕과 함께 소주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수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주잔에 술을 채웠다.
 
“건배… 이런 건 좀 그렇고.”
 
수안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주잔을 그대로 들이켰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어려운 숙제를 시작하는 사람 같았다.
 
“오해가 있었어요.”

 

소주 한 잔에 후끈 달아오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율 씨가 저한테 번호만 주고, 제 번호를 모르는 줄 알았어요.”
수안은 안경을 살짝 추켜올리며 율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느 다른 남자 연예인들과 같은 줄 알고 실망했었어요.

‘나는 인기가 많으니까 연락하고 싶으면 네가 알아서 해라’ 하는 식으로요.”
 
수안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말에 율은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율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다른 남자 연예인들? 하긴… 이런 여자에게 안 반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율은 자신에게만 특별히 철벽을 치는 줄 알았는데, 그녀가 겪었던 '연예인의 가벼운 대시' 경험 속에서 자신이 그저 똑같은 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사실에 질투심이 일었다.
그녀의 털털함과 꾸밈없는 매력은 분명 수많은 남자의 시선을 끌었을 터였다.
수안은 율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래서 제가 오해를 좀 했고, 그거 풀기 위해서 오늘 나왔어요.”
 
수안은 사과와 해명을 모두 끝마쳤다는 듯, 이제야 숙제를 마무리한 학생처럼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율 씨의 행동이 저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였다는걸 나중에 알았어요. 

제가 너무 섣불리 단정하고 선을 그은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율은 수안의 사과를 듣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번호를 저장했다고 말하지 않은 건,  제가 누나한테 부담을 주기 싫어서였어요.

누나가 저한테 연락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고, 제가 먼저 번호를 달라고 하는 건… 너무 욕심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율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근데 누나… 솔직히 말하면, 저는 누나가 저를 너무 미워하는 줄 알았어요.”
 
율은 장난기 없는 눈으로 수안을 바라봤다.
 
“솔직히 저는 다른 연예인들처럼 누나를 가볍게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어요..”
 
율은 맥주잔을 들어 소주를 마신 수안의 빈 잔 옆에 살짝 부딪쳤다.
 
“오해 풀어줘서 고마워요. 근데 이제 오해는 풀렸죠?

그럼 이제 다음 얘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율은 수안의 사과를 듣고 오해가 완전히 풀렸음을 확인하자,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느꼈던 실망감의 원인이 해소되자,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잔을 보더니, 수안이 마셨던 것처럼 자신도 소주를 가득 채웠다.
아이돌 생활 내내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던 율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맨 정신으로 하기 힘든 고백을 위해 용기를 냈다.
 
“저는… 다른 마음이 있어서 나온 건데.”
 
율은 말끝을 흐리며 소주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강렬하고 쓴 소주가 익숙지 않은 목을 타고 넘어가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고, 예민한 미간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그는 쓴맛을 감추지 못하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잠시 괴로운 듯 입술을 꾹 다물었던 율은, 이내 찡그린 미간을 억지로 펴고 수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망설임 없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누나. 나랑 연애 할래요?”
 
갑작스럽고, 너무나 직설적인 돌직구였다.
율의 질문에는 어떤 부연 설명도, 간접적인 표현도 없었다.
그가 이 선술집에 오기까지의 모든 설렘과 고민, 그리고 수안을 향한 강렬한 감정이 이 한마디에 모두 담겨 있었다.
 
율의 돌직구에 수안은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해를 해소하는 사과의 자리'였는데, 율은 순식간에 '고백과 연애'의 자리로 바꿔버렸다.
율의 찡그린 미간과 붉어진 얼굴이 고백의 진심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수안은 어이가 없었다.
 
‘뭐?! 뭘 해?!!.. 그럼 그렇지…’
 
수안이 또 한 번의 실망.

오해를 풀러 나온 자리에 '내 최애가 나보고 연애하자'라고 한다고? 이 무슨 어이없는 상황인지.

수안은 율의 당돌하면서 당당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350만 팬덤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또 속 터질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면 수안은  루미에라 팬덤인 '루미엘'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솔직한 고백이라도, 수안이 생각하는 이 관계는 너무나 위험했다.
수안은 율의 눈을 피하며, 최대한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수안의 단호한 거절에 율은 충격받은 듯 눈이 커졌다.
소주의 쓴맛 때문에 찡그렸던 미간이 이제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상처받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아니 왜요? 나 별로예요? ”
 
율은 당황해서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물론 자신이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접근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이성적으로 '별로'라고 거절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율은 거절당한 충격에 수안의 대답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인기를 이용해서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마음이었기에, 그녀의 단호한 거절은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상처받은 마음에, 율은 테이블 위의 소주잔을 다시 채웠다.
아까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해 미간을 찡그렸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소주를 들이켜자마자 율은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은 수안에게 향해 있었다.
 
“그럼, 나 세 번만 만나보고 결정하면 안 돼요?”
 
율의 목소리에는 취기가 조금 섞여 있었지만, 그만큼 간절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면… 나 상처받는데…”
 
율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수안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이돌로서 늘 완벽하게 포장해야 했던 가면을 벗고, 스물다섯 살 청년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는 수안에게 자신의 진심을 증명할 단 세 번의 기회를 요구하고 있었다.
 
율의 간절한 눈빛과 상처받은 듯한 표정, 그리고 ‘세 번의 기회’를 애원하는 모습에 수안의 마음은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가 느끼는 감정이 순수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의 거절이 더욱 미안하고 아프게 느껴졌다.
하지만 수안은 흔들리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곧 8년 차에 접어들고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한 ‘아이돌 루미에라의 리더 송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안은 율의 부탁에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의 소주잔을 채웠다.
안주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거침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알코올을 주입하는 듯했다.
수안은 속으로 절규했다.
 
‘이 창창한 아이를 내가 앞길을 막을 순 없어. 열심히 활동해야 할 시기… 팬들에게 사랑받을 시기… 이 시기에 아이돌이 연애라니….’
 
그녀에게 율의 고백은 셀렘보다 위험한 폭탄 같았다.
 
‘송율, 정신 차려!! 너 실망이야.’
 
겉으로는 율의 걱정을 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그녀 스스로가 율을 향한 이성적 끌림에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수안의 단호한 거절 후,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의 잔을 채웠다.
소주가 몇 잔 오가자, 술이 약한 율은 먼저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웅얼거렸고, 맑았던 눈빛은 촉촉하게 풀렸다.
율은 테이블에 팔을 괴고 수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미 내 세상은 정수안밖에 안 보이는데… 왜 난 안 되지… 왜 안 돼요?”
수안은 율의 취중 진담에 더 이상 '아이돌' 운운하며 딱딱하게 선을 그을 수 없었다.
 
“안 되는 게 아니라…” 수안이 말을 흐렸다.
 
“그럼요?” 율이 다급하게 물었다.
 
“나도 송율 좋아하지… 루미에라 송율… 내 최애… 그런데…”
수안은 자신의 진심을 어렵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율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어떻게 인기 몰이 했는데…. 이렇게 스스로 무너뜨리는 제안은 아니지….”
수안은 결국 자신이 우려하는 '현실적인 위험'을 토로했다.
 
율은 수안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루미에라 송율의 미래만 소중히 여길 뿐, 눈앞에 있는 남자 송율의 진심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루미에라 송율만 좋고 사람 송율은 별로다?” 율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바보냐?”
수안은 답답함에 자신도 모르게 친근한 반말이 튀어나왔다.
 
율은 잠시 멍해졌다. “누나, 지금 나한테 바보라고 했어요?”
 
“우리 율이 바보 맞나 보네. 바보라는 말에 발끈하는 거 보면…”
수안은 취기에도 불구하고 율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그럼 바보… 랑 세 번 만나봐요. 아니다… 오늘 만났으니까…. 누나가 만나고 싶은 날… 두 번 더 만나요.”
율은 다시 처음의 제안으로 돌아갔다.
 
“또 그 얘기네…” 수안은 고개를 저었다.
 
율은 불현듯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다급하게 물었다.
“내 번호 알죠?”
 
“아니, 핸드폰 부서져서 번호 날아갔어. 그래서 가끔 보고 싶을 때… 연락하려고 했는데 못 했어……..”
수안은 술김에 몇 달 동안 감춰왔던 진실을 무심코 털어놓았다.
번호가 날아갔기에 연락하지 못했던 것이지, 거절 때문에 연락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율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나 보고 싶었어요?”
 
수안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끄덕 숙였다.
“그런데 왜 나랑 안 사귀어요? 내가 좋다는데… 그리고 내가 좋다면서?”
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음… 그건 내가 용기가 없어서…” 수안은 마지막 이유를 고백했다.
 
그 말에 율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수안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율의 세상에 수안이 들어온 것만 같았다.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가 사라지자, 선술집 안의 모든 소음이 멀어지는 듯했다.
 
“정수안 씨,”
율은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내가 오늘 고백했으니까… 나 하는 거 보고 시간이 길어져도 좋으니까 나한테 와줄래요?”
수안은 이미 술과 율의 갑작스러운 가까움에 정신이 혼미했다.
율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율의 옆자리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숙였다.
율은 그 끄덕임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수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수안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에 살포시 입 맞췄다.
 
“누나, 진짜예요?! 진짜 약속해요. 이제 보면 모른 척하지 않기!!”
 
율은 수안을 품에서 살짝 떼어내고는, 그녀의 휴대폰을 가져갔다.
수안이 이전에 잃어버렸던 그의 번호를 다시 저장했다.
화면에는 방금 저장한 이름이 떴다. “곧 사랑하게 될지도 모를 송율”


수안의 끄덕임을 사실상 승낙으로 받아들인 송율은 기쁨에 넘쳤다.
그는 즉시 이 사실을 매니저 준혁에게 알리고 싶었다.
율은 수안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일요일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율: 형, 내일 아니다. 월요일 새벽에 수안누나네로 픽업 부탁해요. 나 오늘 정수안 씨네 가서 잘 거야.
 
준혁은 문자를 보자마자 경악했다. 잠이 확 달아나는 내용이었다.
그는 율의 문자가 술김이거나, 혹은 사고를 쳤다는 뜻임을 직감했다.
 
준혁: 머??? 아니… 너 어디야?
율: 지금 여기 회사 앞 선술집인데…
준혁: 너 거기 있어. 바로 갈게!
율: 왜 아직 회사야?
준혁: 어!!! (너 때문에 밤새 네 스케줄 정리하고 있었는데!)
 
준혁은 율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혹은 율이 어떤 사고를 쳤는지 확인하기 위해 급히 차 키를 들고 선술집으로 향했다.
준혁이 선술집에 도착했을 때, 수안은 이미 취기에 율에게 기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준혁이 온 것도, 율이 준혁에게 문자로 폭탄선언을 한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율은 수안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준혁이 들어왔지만, 율은 수안이 깰까 봐 조용히 결제를 하고 준혁에게 눈짓했다.
 
“형. 결제만 하고 나가서 기다려요. 누나 깨우면 안 돼.”
 
준혁은 운동복 차림으로 율에게 안겨 잠든 수안과, 그런 수안을 아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챙기는 율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결국 준혁은 율의 문자의 내용을 이행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수안은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어제 선술집에서 율을 만났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핸드폰이 부서져서 연락 못 했다'라고 고백했던 것, 그리고 '나도 송율 좋아한다'라고 말했던 것 그 이후의 기억은 새하얀 블랙아웃이었다.
 
'어… 나 집에 어떻게 온 거지.. '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황급히 몸을 일으킨 수안은 자신의 집임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녀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거실 소파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은 깨끗했고, 율이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안심했다.
 
'휴… 다행이다. 율이가 정신 차리고 매니저 연락해서 돌아갔나 보네. 내가 어제 또 민폐를 끼쳤구나….'
 
수안은 후회와 동시에, 자신이 술김에 율에게 '나도 좋아한다'라고 고백한 사실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 오해는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순간, 수안의 휴대폰이 '띠링' 하고 울렸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액정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곧 사랑하게 될 송율 '이었다. 어제 율이 자신의 폰에 저장해 둔 이름이었다.
 
[율]
누나, 일어났어요? 😍
 
문자에는 방금 일어난 듯한 수안의 걱정과는 정반대로, 율의 설렘과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안은 어제의 일이 단순히 '오해 해소'로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자신의 '블랙아웃' 사이에 율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수안]
네.. 잘 들어갔죠? 그런데 어제 무슨 일… 일진 않았죠?
폰에 번호 지워진 것 말한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제가 실수한 거 없나요? 그럼 미리 죄송….
 
율은 수안의 문자를 보고 키득거렸다.
어제의 기억이 희미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만큼 수안의 순수한 진심이 취중 진담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율]
음… 있었는데? 😍😍 누나 설마 나 보고 싶었다는 것… 기억 안 나요?
 
율은 핵심은 숨긴 채, 수안이 술김에 했던 귀여운 고백부터 꺼냈다.
수안은 율의 문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도도한 척했다가 망했네… 술을 끊든지 해야지.. 후..'
 
그녀는 속으로 자책하며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율이 더 이상은 말하지 않자, 그녀는 가장 위험했던 순간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안]
그렇구나… 그거 말고는?
 
율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그거 말고는?'이라고 물었으니, 이제 자신이 기억하는 '긍정의 끄덕임'을 꺼낼 차례였다.
 
[율]
누나가 나 받아주기로 했는데?
 
수안은 율의 문자를 읽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안]
뭐라고요?????
 
수안은 급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에 쥔 휴대폰이 떨렸다.
자신이 아무리 술에 취했더라도 '안 된다'라고 그렇게 선을 그어 놓고, 율을 '받아주겠다'라고 했을 리는 만무했다.
 
[수안]
거짓말… 농담하지 말고….
 
수안의 문자는 단호한 거절이 아닌, 현재 상황에 대한 믿을 수 없다는 절규였다.
율은 수안의 절박한 답장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수안의 블랙아웃 덕분에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수안이 자신에게 '용기가 없다'라고 고백했기에, 율은 이 상황을 밀어붙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율은 침대에 기대 누워 편안하게 답장을 보냈다.
그의 폰에는 수안의 번호가 [내꺼❤수안]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율]
에이, 농담이라니. 누나 어제 분명히 끄덕끄덕 했잖아요.
내가 '나 하는 거 보고 나한테 와줄래요?' 했을 때, 누나가 '응' 대신 고개 끄덕였잖아요.
그리고 내가 누나 안아주고 머리에 뽀뽀도 했는데... 기억 안 나요? 😔😔
 
율은 '뽀뽀'라는 단어에 수줍음과 함께 살짝의 능청스러움을 섞어 보냈다.
그는 수안이 '고백'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긍정의 신호를 보냈고, 자신이 그 긍정으로 행동했음이 중요했다.
 
수안은 율의 문자를 읽는 순간, 어젯밤 율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와, 그녀의 머리칼에 닿았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아련하게 되살아났다.
 
'나 하는 거 보고 나한테 와줄래요?'...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자신이 떠올랐다.
 
'미쳤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수안은 머리를 쥐어 잡았다.
율의 제안은 '나랑 연애하자'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녀의 이성적인 방어벽은 취중 진심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수안]
아…. 율 씨. 그건 내가 술에 취해서… 그리고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런 거예요. 이건 무효예요.
 
[율]
무효라니? 누나, 나한테 '용기가 없어서'라고 했잖아요.
내가 그 용기 내줄게요. 우리 오늘부터 1일은 아니지만, 오늘부터 썸 타는 거예요.
누나는 나한테 도망가지 않기, 나는 누나한테 들이대기. 이거 어때요?
 
율은 거절당하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하면서도 확실한 제안을 던졌다.
수안에게는 '무리한 연애'라는 부담을 덜어주고, 자신은 그녀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명분을 만든 것이다.
수안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썸이라니?.. 하.. 그것도 루미에라 송율이랑?.. 어제 도대체 무슨 짓 한 거야! 정수안!!'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반쯤 넘어가 있었다.
율의 눈빛, 율의 솔직함, 그리고 그녀의 취중 진심이 섞여 만들어진 이 상황에서, 그녀는 더 이상 율을 밀어낼 용기가 없었다. 
 
[수안]
그래.. 그럼 딱 두 번... 두 번 만이야.
 
율은 수안에게 두 번의 만남을 허락받자마자 매니저 준혁에게 상의했다.
수안의 '거리두기' 시전을 막기 위해, 준혁은 가장 안전하면서도 사적인 장소를 물색했다.
 
준혁: "가장 예매율이 낮은 심야 영화관의 가장 구석자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다만… 너무 어색할 수 있음 주의".
 
 
[장소] 서울 외곽의 한 심야 영화관, 가장 예매율이 낮은 영화의 구석자리.
 
약속 당일, 율은 캐주얼하지만 멋진 옷차림으로 영화관에 도착했다.
수안은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마스크를 깊게 눌러쓰고 가장 늦게 입장했다.
극장 안은 예상대로 한산했고, 둘은 약속된 구석자리에 앉았다.
마치 선보는 사람들처럼, 둘 사이에는 팽팽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둘은 팝콘이나 음료 대신 각자 숨 막히는 긴장감만을 홀짝거렸다.
영화가 시작되고, 스크린 속 이야기가 중반부에 접어들 무렵. 둘 사이를 가로막던 팔걸이가 스르륵 소리 없이 올라갔다.
 
수안은 순간 긴장했다.
율의 손이 움직인 건지, 아니면 율이 팔꿈치로 팔걸이를 건드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둘 사이의 물리적인 벽이 사라지자 공기가 훅 가까워진 듯했다.
 
잠시 후, 율의 팔꿈치가 느슨하게 수안의 팔꿈치에 기대어 왔다.
아주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수안은 온 신경이 그 접촉 부위에 쏠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율은 애써 영화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팔꿈치에서 느껴지는 수안의 체온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정이 그의 이성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영화를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수안의 옆모습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분위기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율이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율: "죄송해요. 저 먼저 나가있을게요."
 
수안이 놀라 율을 돌아봤을 때, 율은 이미 마스크를 고쳐 쓰고 출구 쪽으로 황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수안은 영화관에 홀로 남아 망연자실했다.
잠시 후, 수안의 휴대폰에 율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율]
거기에 더 있으면 내가... 누나한테 나쁜 짓할 거 같아서 나왔어요. 미안해요.
 
율은 수안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까 봐, 혹은 혹시라도 대중에게 발각되어 수안에게 피해를 줄까 봐 두려워 첫 번째 데이트를 스스로 날려버린 것이다.
수안은 문자를 읽고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쁜 짓'이라니. 그의 순수한 진심에 대한 확신과, 그의 무모한 열정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했다.
 
'바보. 그런 걸 '나쁜 짓'이라고 표현하는구나….'
 
율의 의도치 않은 도피로 인해, 둘의 첫 번째 만남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수안은 이제 남은 '딱 한 번'의 기회가 더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장소] 한강 공원 벤치 [시간] 5월 x일 금요일 밤 11시,

(율 연습 끝, 수안 퇴근 후)
율은 수안이 보낸 장소와 시간을 따랐다.
한강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캔커피를 하나씩 들었다.
5월의 금요일 밤,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날씨는 적당히 시원하고 포근했다.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율이었다.
 
율: "음.. 날씨 좋다. 그쵸?"
수안: "그렇네요. 날씨가 적당히 시원하면서, 따뜻하면서 좋네요."
율: "나 예전에 누나 본 적 있어요."
 
수안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수안: "나를? 어디서?"
율: "예전에 한강에서.. 아침에 조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봤어요."
율: "그때 데뷔 2년 차였나... 3년 차였나... 군대 가기 전에.. 잠이 너무 안 와서 한강에 나왔는데.. 어떤 사람이랑 눈이 마주쳤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누나였어요. 그때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누나 본다고 잠깐 새벽마다 한강에 나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새벽인데.. 누나가 전화로.. '정수안입니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아.. 저분 이름이 정수안이구나 했는데, 비 오는 날 현장 스태프로 누나가 있더라고요. 그땐 그냥 모른 척했는데. 인사하면서도 엄청 떨렸어요. 한강에서 내가 찾던 사람이 내 무대 뒤에 있네? 잘 보여야지. 잘해야지. 하다가 미끄러졌어요. 대차게 망한 거죠."
 
율은 캔커피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더니, 수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율: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한 사람만 봐요. 그때도.. 지금도..."
 
율의 말에 수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국에 와서 현장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하며 체력이 필요하다 느껴 새벽 조깅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율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수안의 머릿속에 '우연이 세 번이면 운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율을 자신의 옆에 두게 될 것인데,
'그럼 우리 율이의 커리어는? 그럼 나는?' 그녀의 이성이 다시금 강하게 경고했다.
 
수안이 한국에 온 이유에 송율은 없었지만, 이제 앞으로의 이유에 송율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때, 수안이 내린 결론은 '율과의 서서히 거리두기'였다.
 
'이게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면 멀어질 것이고, 이것이 운명이라면 또 언젠가는 율이를 만나겠지.. 그때는 그 운명을 받아들여보겠어.'
수안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거리 두기를 다짐했다.
 
수안: "율 씨… 이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음 만남은 없다고 했지만, 내가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었잖아요."
율: "생각은… 끝났어요? 누나."
 
율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수안은 율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폭발하기 직전, 스스로 벽을 쌓아야 함을 느꼈다.
 
수안: "아직이요. 내가 한국에 온 이유에 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성공하고 싶어요.  나도 내 커리어가 중요하거든요."
 
수안은 차갑고 단호한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율을 밀어냈다.
율은 그녀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수안은 벤치에서 일어나 율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 강렬한 고백과 차가운 거절 이후, 수안은 율의 앞길에 자신이 방해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지독한 단절을 시작한다.
그녀는 율과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 이후에 도착한 율의 문자를 차단했다. 그리곤 단 하나의 이모티콘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율의 순수한 진심과, 자신의 경직된 이성 사이에서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수안은 더욱 불안해졌다.
율이 정말로 그녀를 데려다 주기 위해 회사 근처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후 7시 50분, 율에게서 마지막 통보가 왔다.
 
[율]
누나. 8시에 회사 앞에서 딱 10분만 기다릴게요.
10분 안에 나오지 않으면, 저는 누나의 마음을 포기하고 다시는 사적인 연락 안 할게요.
 
수안은 시간을 확인하며 애써 짐을 정리했지만, 손은 떨렸다.
 
[율]
… 1분 남았어요…
 
수안은 율의 마지막 재촉에 결국 무너졌다.
율이 그녀의 마음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을 차마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회사 앞에서 그를 만날 용기도 없었다.
 
[수안]
기다리지 마요..
 
율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율은 마스크를 깊게 눌러쓰고 회사 앞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그의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기다리지 마요.'이 단호한 문장에 율의 표정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다음 문자가 도착했다.
 
[수안]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문자 줄게요.
 
수안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문자 줄게요'라는 답장을 보낸 후, 율은 그 답변을 일종의 '보류'로 받아들였다.

더 이상 수안에게 저돌적으로 들이대지 않았다.
수안의 단호함과 거절이 계속되자, 율은 자신이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외면할 수 없었다.
율은 수안에게 실망보다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수안은 여전히 특별했지만, 그는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보호막을 쳤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율은 수안을 완전히 잊으려 노력했지만, 무대 한쪽에서 수안이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무대 위에서 환호하는 팬들을 볼 때나, 화려한 조명 아래 설 때마다 마음 한편은 여전히 허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미에라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율은 냉정하고 완벽한 리더, '송율'로서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프로페셔널한 태도와 완벽주의는 더욱 빛을 발했지만, 그의 눈빛은 2년 전보다 훨씬 차갑고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 사이 수안은 율이 바랐던 대로, '아이돌 행사  스태프'가 아닌 '공연 기획자 정수안'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수안은 율을 잊으려 노력하는 유일한 방법이 일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2년 동안 숨 막힐 듯이 일에 몰두했고, 그 결과는 눈부셨다.
그녀는 이제 서브 기획자가 아닌, 메인 연출팀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 톱클래스의 기획자로 인정받았다.
같은 연차의 기획자들 중에서는 정수안의 능력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수안은 2년 동안 루미에라의 모든 국내외 공연 기획에서 의도적으로 빠져 있었다.
그녀는 소속사 내 다른 그룹이나 외부 프로젝트만을 전담하며, 율과 마주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지독하게 차단했다.
율 역시 수안의 일방적인 단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어떤 공적인 행사 및 사적인 자리에서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두 번의 만남 속에 뜨거웠던 기억은 두 사람에게 봉인된 듯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의 정점을 맞이하던 해, 12월 31일이었다.
거리에는 연말의 소란스러움과 축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수안은 홀로 있었다.
지독하게 일에만 몰두했던 2년, 그녀는 그 보상으로 얻은 고독을 달래기 위해 오랜만에 익숙한 선술집을 찾았다.
선술집은 2년 전, 율과 처음 만났던 그곳이었다. 수안은 그곳을 피했지만, 연말의 허전함은 그녀를 결국 그 자리로 이끌었다.
 
수안: "사장님, 늘 먹던 걸로요."
사장: "수안 씨 오랜만에 왔네? 편한 데 앉아요. 금방 가져다줄게요."
 
사장님이 차려준 늘 먹던 메뉴 앞에서 수안은 소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2년 전처럼 어떤 시선의 걱정 없이. 그녀가 소주잔을 입가에 가져가던 찰나, 익숙하지만 차갑게 변한 목소리가 들렸다.
 
율: "사장님, 잔 하나 주세요."
 
수안은 소주잔을 든 채 그대로 굳었다.
 
수안: "어?!" (멀뚱멀뚱)
 
율은 수안의 앞자리에 앉아 마스크를 벗었다.
2년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턱선과, 더욱 깊어진 눈빛이 수안을 사로잡았다.
 
율: "드디어 만났네. 너무 오랜만에 온 거 아니에요?"
 
수안: (말없이 소주만 들이킨다)
 
율: "소주 그렇게 마시면 속 버려요."
 
수안: (여전히 말없이 소주만 마신다)
 
그때 사장님이 소주잔을 가져왔다.
율은 사장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수안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율: "누나, 나도 한 잔 줘요. 2년 동안 누나 기다리면서 마셨더니 주량이 조금 늘었어요. 덕분인가?"
 
율은 차가운 표정 속에 과거의 감정을 긁어내는 말을 던졌다.
수안은 율을 슬쩍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려 쳐다봤다.
그것은 율의 능글맞은 도발에 대한 수안 특유의 미소이자, '내가 아직 널 잊지 않았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수안은 율의 잔에 술을 따랐다.
 
율: "여기 오면 누나 볼 줄 알고... 시간 될 때마다 왔었는데… 늘 없더라고…. 내가 바보 같았지."
 
율은 스스로를 바보라 칭했지만, 그 말은 수안에게 '보고 싶었다'는 말을 대신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소주 두 서 병을 비워낼 때쯤, 둘 다 꽤 취한 상태가 되었다.
수안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율의 눈빛은 차가움 대신 따뜻한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율: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2년 동안 묻어뒀던 순수한 감정이 술기운을 빌려 터져 나왔다.
 
수안: "보고 싶었지…."
 
수안의 진심 어린 대답에 율의 눈이 커졌다.
 
율: "왜 문자도 전화도 안 했어요? 또 핸드폰 부서졌어요?"
 
수안: (고개를 저으며) "아니… 용기가 안 나서… 내겐 송율은 내 협업 클라이언트보다 내 마음 다해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거든. 반짝반짝 빛날 너의 모습에 내가 방해가 될 순 없잖아…."
 
수안은 2년 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이성적 이유를 토해냈다.
 
율: "그게 다예요? 정수안 씨, 나 사랑해요?"
 
수안: (끄덕끄덕)
 
율: "왜 술만 먹으면 이렇게 고백을 하지…. 나 설레게…."
 
율은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술로 희미해진 머리를 붙잡고, 2년 전 받았던 상처와 지금 이 순간 터져 나오는 진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율: "정수안 씨, 진짜 이번엔 마지막으로 물어볼 거예요. 또 기억 못 하면 안 돼요. 정수안 씨, 나랑 연애할래요?"
 
수안: (끄덕끄덕)
 
율은 눈이 커졌다.
2년 동안 봉인했던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 건너편에서 수안의 옆자리로 용기 내서 앉았다.
수안과 떨어져 있는 동안 율은 아이돌로서의 책임감과 공적인 태도를 배우며 많이 성숙하고 차분해졌다.
그는 이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율: "정수안 씨, 나 키스할 건데, 피하고 싶으면 피해도 돼요."
 
율은 수안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뜨거웠다.
율은 고개를 살포시 돌려 수안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수안은 피하지 않았다.
그동안 지독하게 피했던 율의 손길과 입술을, 그녀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율은 수안에게 키스한 후,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율: "누나, 아니 정수안 씨, 오늘 당신 옆에 있어도 돼요?"
 
수안은 이미 술과 감정에 취해 이성의 벽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율은 그 긍정의 신호에 안도하며, 수안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그 순간만큼은 수안도 4살 어린 연하남이 아닌, 그냥 남자 송율로 느껴졌다.
2년 동안 그녀가 지켜야 했던 모든 규율, 모든 원칙이, 따뜻하고 단단한 율의 품 안에서 녹아내리는 듯했다.
율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수안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더 이상 앞서 나가지 않았다.
2년 전 선술집에서, 수안이 자신에게 '용기가 안 났다'라고 고백했음을 알기에, 율은 그녀가 편안함을 느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림 끝에 얻은 그녀의 마음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율은 수안을 부축해 택시에 태웠고, 그녀의 집까지 따라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자신은 술이 깨도록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율은 수안을 혼자 두고 나갈 수가 없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수안은 머리가 깨질 듯한 숙취와 함께 눈을 떴다.
자신이 집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었지만, 더 놀란 것은… 율이 상의를 탈의한 채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던 것이었다.
수안은 이불을 황급히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자신의 옷은 밤사이 셔츠만 벗겨져있고, 나머지 하의는 그대로였다.
 
'뭐야… 얘는 왜… 여기서 자….'
 
어제의 일들이 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선술집, 고백, 끄덕거림, 그리고 키스….
 
'아, 맞다… 연애하기로 했지….'
 
수안은 율이 아무 일 없이 자신의 옆을 지켜줬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완벽해 보이던 아이돌의 얼굴 대신 귀여운 스물 다섯의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2년 전 수안이 지키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순수한 얼굴이었다.
수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숙여 율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잘 자, 우리 율이.' 속으로 나지막이 되뇌었다.
그 느낌을 받았는지, 율이 "으으응" 소리를 내며 잠결에 수안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수안은 그의 단단한 팔에 갇힌 채 미동할 수 없었다.
 
이번에 놀란 것은 율이었다. 수안을 끌어안은 팔에 느껴지는 감촉이 이상했다.
'어?! 왜 부드러워… 누구지….
 
율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수안이었다.
율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의 상체가 완전히 드러나자 수안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율: "누나! 정수안 씨! 왜… 왜 여기 있어요?" 율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수안: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어젯밤 기억 안 나?!" 수안은 기억이 없는 척 큰소리를 쳤다.
 
율: "어제… 선술집… 소주 두 병… 그리고… 고백… 키스…" 율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제가 누나 데려다 드리고… 옆에서 잠들었어요. 근데… 제가 왜 상의를 벗고…."
 
율은 자신의 옷차림에 당황했다.
수안은 율의 당황한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수안: "너… 어제 나한테 키스했어. 그리고 사귀자고 했고, 나도 그런다고 했고...
그리고 네가 내 옆에 있잖아! 네가 먼저 내 옷을 벗긴 거 아니야?"
 
율: "네?! 아니에요! 제가 어제 누나 숨 쉬는데 어려워하길래 단추만 몇 개 풀어줬는데…"
 
율은 순수한 얼굴로 변명했다.
수안은 율의 황당한 고백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수안: "그래. 인정. 2년 동안 기다린 거 칭찬해 줄게. 이제 사랑 고백하는 문자는 그만 보내."
 
율은 수안이 웃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율: "누나, 우리… 진짜 오늘부터 1일이죠? 어제 술김에 한 거 아니죠?"
수안: "응. 아니야." 수안은 율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율이 보고 싶고.. 안고 싶었어."
 
수안의 솔직한 고백에 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토록 갈망했던 말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율: "진짜요? 안아줄게요.. 그리고 뽀뽀도 해줄래요."
 
율이 벌린 팔에 수안이 기다렸다는 듯 망설임 없이 안겼다.
2년의 단절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율은 그런 수안을 놓칠세라 온 힘을 다해 꼭 안아줬다.
율의 머리카락이 수안의 어깨에 닿았다.
 
율은 수안을 품에 안은 채,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토록 하고 싶던 뽀뽀를 맘껏 하는 율이었다.
이마에, 눈가에, 그리고 입술에 짧고 다정한 입맞춤을 이어갔다.
 
율: "누나, 사랑해요. 이제 진짜로 내 여자친구예요."
 
수안: "바보. 이제 도망 못 가."
 
수안은 율의 상체를 감싸 안으며, 2년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이 평범한 아침의 행복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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